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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다음세대를 살리고 있습니까 ②청소년부 회복과 부흥 과제김형민 목사(청소년전문사역자)

위로부터 구원중심 가치관 흘러넘쳐야 청소년부가 산다

구원이 성공보다 중요하며, 나의 영광보다 하나님 영광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행복을 전교회적으로 가르쳐야

김형민 목사
(청소년전문사역자)

전도사가 되고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청소년사역현장을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만큼 필자에게 지역 교회의 청소년부는 내가 살아난 곳이고, 다음세대의 아이들이 살아나야 할 곳이기에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나 20대부터 30년 가까이 내 인생의 황금기를 청소년사역에 바쳤지만, 가끔 청소년사역자로서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시험기간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예배를 사수하도록 요청할 때, 입시로 인한 압박으로 방학기간에도 학원과 과외를 받을 수밖에 없는 학생들에게 하나님과의 집중적인 만남을 위해 수련회 참석을 권할 때는 아직 멀었다는 한계를 느낀다.

믿음이 없는 아이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녀의 영적인 상태나 발달에 관심이 없고 성적과 입시의 성공에만 관심을 가진 교회 안의 부모님들을 앞에서는 무력감을 느낀다.

교회안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님은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잘 붙어 있기만 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작금의 교회 청소년부는 열매 없이 비어가는 것일까. 필자는 이 원인을 교육부서 자체보다, 교회 안의 보다 근본적인 곳에서 찾고 싶다.

우리 교단은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이 세상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성취를 이루어 내는 사명자를 키워내는 개혁주의 신앙을 받들고 있다. 그러나 교회미래학자들은 지금 상황이 이어진다면 한국교회는 향후 30년 내로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처럼 주일학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왜 이런 전망이 나오는 것일까?

필자는 청소년부서 내의 전략 문제도 있지만, 교회가 청소년들에게 신앙의 가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교육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구원이 진학과 성공보다 중요하며, 내가 영광을 받는 것보다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구원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 구원중심의 가치관이 강단으로부터 흘러나와 담임목사와 당회, 그리고 제직들에 이르기까지 교회 전체에 자연스럽게 흘러 넘쳐야 한다.

열매가 없다면 문제는 공급처인 교회에

청소년부가 살아나려면 제 아무리 유능한 청소년사역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서 자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청소년부서에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자양분의 공급처인 가지, 곧 교회에 문제가 없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는 수많은 청소년들의 가치관을 개혁주의 신앙과는 반대로 몰아가고 있다. 거룩과 영혼구원의 가치관은 오간데 없고, 오직 성공과 물질만능의 맘몬 우상이 청소년들의 가치관을 사로잡고 있다. 일선에서 청소년사역자들은 저들의 영혼을 붙잡고 애통하며 씨름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부모님과 교회 리더십의 가치관이 세상을 닮아 있을 때, 청소년사역자들의 노력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진다. 교회 안에 성공과 물질중심의 가치관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교육부서의 예배와 수련회는 청소년들에게 의미를 주지 못한다. 청소년부서의 예배와 수련회는 성공과 물질을 보장해주는 입시와 진학과 진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을 잡아먹는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합격하면 회개, 떨어지면 감사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보는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빚지고 환란당한 사람들을 체휼하며 영혼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성경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양육받은 우리 교단 교회의 청소년부 출신 학생들은 이런 성경적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대학을 떨어지면 남들 보기에 창피해서 교회를 떠나거나, 유명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원치 않은 지방대학이나 전문대학에 가게 될 경우 의기소침하여 공동체에서 소원해지는 분위기가 나타난다.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우리들교회는 ‘합격하면 회개, 떨어지면 감사’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한 번에 합격하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내 수준을 낮게 보신 것인가. 성숙에 이르게 하는 불합격이라는 연단도 없이 한 번에 합격하게 하시니 나의 수준 낮음을 회개하고, 오히려 나를 수준 높게 보셔서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체휼하며 연단을 잘 받아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떨어짐의 축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는 뜻이다.

교회는 철저히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구원중심의 가치관이 강단으로부터 선포되고 당회와 제직, 성도들에게까지 편만해야 한다. 바로 그때 다음세대의 사역이 살아날 수 있다. 특히 혹독한 입시제도가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자녀의 영혼구원과 자녀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고 다른 이들을 돕고 살리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누군가에게 자랑할 수 있을만한 명문 대학을 들어가고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다면, 청소년들의 영혼구원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돕는 교회의 청소년사역은 힘을 받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성경이 주는 차원이 다른 행복

대한민국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작금의 교육과정은 모든 학생들에게 봉사활동을 권하고 있고, 이를 생활기록부에 반영하고 있다. 사회과학자들은 연구결과에서 자원봉사를 학생들에게 시켜보았더니 자원봉사를 받는 대상자보다 자원봉사를 하는 학생들의 자기효용감과 진로탐색에 큰 도움이 되더라는 것이다. 즉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 나아가 영혼구원의 도구가 되는 삶은 물질과 명예, 성공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이고도 상대적인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이라는 선물을 주더라는 것이다.

교회의 청소년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부러움을 받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당연히 교회를 다니는 학생들이 좋은 결과를 내주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목적과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자녀들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성경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모의 야망을 이루어 주고, 열등감을 해소해 줄 도구로서의 자녀가 아니라, 이 자녀가 어린시절부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나아가 개혁주의 신앙의 소중한 가치들을 전승할 다음세대의 교회의 일꾼으로 자라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강단을 책임지고 있는 담임목사님들과 교회의 치리기관인 당회는 평상시 어떤 가치관을 전수하고, 성도들이 자녀들의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지를 위로부터 점검해야 한다. 성경적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청소년부서의 사역자와 부장, 교사들과 학생들에게까지 내려가도록 해주어야만 한다.

문제 자녀는 ‘보석’이다

청소년시절 사춘기의 생물학적, 정서적 변화를 겪는 아이들은 부모와 대립각을 세우며 당혹케 하는 일탈행동을 하게 된다. 이때 구원의 관점에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부모는 자녀의 일탈행동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부모는 두렵고 떨리고, 자녀의 일탈행동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자녀의 장래를 걱정하며, 교회와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쉬쉬한다.

구원의 관점에서 늘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는 오히려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이 사건을 통해서 주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내 마음의 평정을 찾고, 하나님께서 부모를 회개케 하시는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우리들교회는 그래서 문제 자녀를 ‘보석’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비록 조개 속에 감추어진 것과 같은 존재이지만, 이내 이 자녀의 수고를 통해 부모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부모는 자녀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는 불신자들을 살려내는 준비된 성도가 되도록 돕는 ‘보석’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강퍅한 애굽의 바로왕을 결국 무릎 꿇게 한 것은 장자의 고난이었다. 모든 부모에게 자녀의 고난은 인생에 최고의 고난으로 부각된다. 따라서 필자는 자녀의 고난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된 많은 부모님들을 알고 있다. 그럼으로 교회는 세상의 관점으로 부족하게 보이는 청소년들을 정죄하고 율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시선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그들을 축복의 통로가 되는 보석과 같은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그 어떠한 대안교육기관이나 전문상담기관을 능가하는 권능이 있다. 필자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세상의 부한 자, 능한 자. 가난한 자, 환란당한 자 모두가 와야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초대교회의 제자들과 성도들의 프로필이 초라했지만 그들에게 세상을 이길 권능이 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의 청소년사역도 교회의 리더십과 부모들의 가치관부터 바뀌어질 때, ‘그 교회에 가면 자녀들이 살아난다더라’는 소문이 나고, 이내 부흥으로 이어질 것이다.

기독신문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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