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백년 미션스쿨, 여전히 찬란한 이름

▲ 1904년에 촬영한 정명여학교 최초의 학생들과 선교사들의 모습.

‘탁월한 여성인재 양성’ 긍지로 역사 일구다

‘믿음 소망 사랑’ 신앙 교훈 실천적 계승,
‘예수와 함께하는 힐링교육’ 으로 이어나가

정명여고의 아름다운 교정에 봄볕이 든다. 겨우내 가라앉았던 생명의 기운들이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다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 가운데서 터지는 청춘들의 맑은 웃음소리는 유달산과 삼학도에까지 울려 퍼진다.

▲ 첫 학교 건물과 기숙사 전경.

“당신이 길러내신 어린 딸들은/가지각색의 꽃으로/울긋불긋 곱고 아름답게/활짝 피어나 산지사방으로/그 향기를 풍겨내고 있습니다/그리고/그 향기는 앞으로도 길이길이/이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중 한 사람인 박화성씨가 정명학교 개교 80주년을 기념해 ‘나의 모교 정명’이라는 제목으로 쓴 시의 한 대목이다. 글귀 하나하나마다 모교에 대한 애틋한 정과 자랑스러운 마음이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정명여고의 교정은 박화성씨의 시비처럼 역대 졸업생들의 정성으로 꾸며져 있다. 5회 동문인 김영란씨는 남편 고훈 목사를 통해 ‘네가 어디있느냐’라는 제목으로 모교 정원에 또 하나의 시비를 세웠고, 이랜드 박성수 회장의 모친 김영순 동문은 몇 해 전 중학교에 근사한 강당 겸 공연장 건물을 선사했다. 뿐만 아니다. 재학 당시 학교에서 받은 상장과 졸업장들, 손수 제작한 자수와 회화 서예 등의 작품들을 모교로 보낸 동문들의 정성으로 정명 100주년기념관의 역사전시실은 풍성하게 채워졌다.

▲ 정명여중 교목 윤삼열 목사와 양동제일교회가 학교에 기증한 정명탑. 십자가 사랑을 온 우주에 가득 채우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매년 4월 8일은 정명의 동문들이 하얀 저고리차림으로 모교에 모이는 날이다. 기미년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선배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어린 후배들과 함께 힘차게 만세행진을 벌이는 이들의 모습에는 긍지가 가득하다.

정명여고의 또 하나의 자랑인 합창단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다. 정명여고 프레이즈합창단(지휘자:김영문)의 정기연주회가 열릴 때면 합창단 선배들은 관객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엘토스’라는 이름의 동문중창단으로 찬조 출연하거나 혹은 인기 CCM가수인 조수아씨처럼 특별게스트로 무대에 함께 선다.

▲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정명100주년기념관.

중창단 시절부터 무려 44년간이나 이어진 역사 속에서 국내외에서 수백 차례의 연주회와 20여장의 음반을 발매하며, 정명여고 프레이즈합창단이 뛰어난 실력과 명성을 가진 합창단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도 이처럼 앞에서 길을 만들고 뒤에서 밀어주는 선배들의 역할이 컸다.

모교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야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정명 가족들의 경우는 더욱 각별해 보인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신앙적 교훈 아래 114년이나 이어져 온 정명여고의 교육철학과 그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명학교가 1903년 목포여학교로 개교할 당시 양동 언덕은 공동묘지로 사용되던 암울한 장소였다. 그곳을 희망의 땅으로 일군 유진벨 등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 성차별과 신분차별에 짓눌려있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는 역사가 일어났다.

▲ 믿음 소망 사랑의 교훈이 적힌 탑 앞에선 정명여고 교장 정종집 장로.

정명이라는 이름 아래 한 데 모인 여학생들에게는 남다른 유대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고, 초대 교장 서여사(본명 F. 리카 스트래퍼)로부터 역대 교사들의 헌신적인 양육 속에서 여린 소녀들은 자신 뿐 아니라 민족과 시대를 짊어지는 여장부들로 자라났다. 그들은 우정의 언덕 위에서 친구이자 동지로서 함께 할 것을 기약했고, 평생 그 약속을 지키며 살아왔다.

지금도 그 전통은 살아있고, 정명은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기독교사학으로 사랑받으며 제 본분을 다하고 있다. 21대 교장으로 부임한 정종집 장로는 ‘예수와 함께하는 힐링 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비전으로 학교를 이끌어가는 중이다.

‘힐링(HEALING)’이란 그 자체로 치유의 교육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각자의 글자가 건강(H) 에너지(E) 능력(A) 주님(L) 집중(I) 관계(N) 세계적 사고(G)를 뜻하는 전인적 교육을 지향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 현재의 정명여고 본관 모습.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글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주 예수를 가리키는 ‘Lord’라는 단어이다. 정명여고의 핵심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신앙교육을 위해 매일 학급예배와 주1회의 전교생 경건회 및 교직원기도회가 진행된다.

80여명의 학생들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달리다굼’ 동아리는 학교와 조국 그리고 열방을 향한 복음사역을 위해 자발적으로 뜨거운 기도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앞서 소개한 정명프레이즈합창단과 찬양동아리 ‘이디엘’ 등은 음악을 통한 선교활동에 오랫동안 매진해왔다.

▲ 역대 동문들이 후배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는 성경의 메시지를 담아 교정에 세운 정명등.

여기에 독서 및 토론으로 대표되는 정명여고만의 특별한 교육활동들이 탁월한 실력의 여성인재들을 양성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특히 ‘토론광장 아고라’라고 불리는 학생들의 자율적 시사토론이 매일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 이루어지며, 겨레와 시대를 품고 살았던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뚝심 있게 계승하는 중이다.

정종집 교장은 “앞으로도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독교학교로서 튼튼히 자리매김하며 발전할 수 있도록 모든 학교 구성원들이 혼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 정명여고 학생들이 목포 4·8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에 함께 하고 있다.

커다란 긍지, 4·8 만세운동
1919년 목숨건 나라사랑 기개 계승하다

1983년 2월의 일이었다. 5대 교장인 존 S. 니스벳의 한국 이름을 따 유애나관이라 불리는 석조건물을 개조하기 위해 보수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천장을 뜯어내는 작업이 진행되다가 뜻밖의 물건들이 발견됐다.

▲ 정명여고 100주년기념관에 전시된 독립가 등 만세운동 관련 유물들.

기미년 만세운동 당시 사용됐던 독립선언서와 앞서 일본에서 발표됐던 2·8독립선언서,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보내는 격문, 해방의 의지를 담은 독립가, 그리고 비밀 지하신문 등의 문서들이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숨겨둔 이 소중한 물품들이 개교 80주년을 즈음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열기가 호남지역까지 전해졌고, 목포에서도 3월 20일 한 차례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가운데, 위의 문서들이 광주를 거쳐 목포에 전달됐다. 이를 기반으로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양동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목포 4·8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8일 오전 2교시 수업이 끝난 후 같은 미션스쿨인 영흥학교에서 울린 비상종소리를 신호로 학생들과 교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벌였고, 목포 시내는 순식간에 만세열기로 가득 찼다. 황급히 출동한 일본 경찰들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명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도 시민들과 함께 체포됐다. 정상적인 학사진행이 불가능해진 정명여학교는 부득불 임시휴교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1920년부터 한 동안은 졸업생 배출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 만세운동을 기념해 정명여고 교정에 세워진 독립기념비.

하지만 학생들의 독립의지마저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명여학교에서는 1921년 11월 14일과 1930년 2월 7일에도 만세운동이 반복해서 일어났고, 결국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자진 폐교를 선택한다.

10년 만에 복교한 정명학교에 4·8만세운동의 역사는 커다란 긍지가 됐고, 지금도 갖가지 기념물과 재현행사 등으로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기개를 계승하고 있다. 특히 2001년부터는 매년 4월 8일을 즈음해 교정에서 출발해 기미년 당시의 행진 경로를 따라 만세행렬을 벌이는 재현행사와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창의적 체험활동, 자부심이 되다

정명여고 신입생들은 입학식 전 ‘신입생 고교적응교육 및 명사초청 비전스쿨’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틀 동안 계속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신입생들은 3년 동안 진행될 정명여고의 교육과정 전반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물론, 각계의 저명한 인사들과 성공적인 학창시절을 보낸 선배들을 만나는 기회를 갖는다. 전문강사로부터 스포츠댄스를 배우는 시간, 찬양콘서트 등도 일정에 포함된다.

이 프로그램은 정명여고가 연중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창의적 체험활동 중 하나이다. 이 체험활동들은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진흥센터로부터 국가 인증 청소년수련활동으로 공식 지정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특히 17회째를 맞는 4·8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는 정명여고의 대표적인 체험활동이다. 정명중학교 학생들까지 800여명이 학생들이 함께 하는 이 행사는 목포 시내 일원과 유달산 노적봉까지 이어지는 만세행진 재현 뿐 아니라 태극기 만들기, 전국청소년백일장대회, 사진전시회 등 다채롭게 이루어진다.

4월 7일부터 9일까지 이어지는 올해 행사에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엽서만들기, 나라사랑 강연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제목의 플래시몹 등이 계획되어있다. 학생들은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며 애국심을 고취한다.

다문화체험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체험활동이다. 이 활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목포 일원의 다문화가정을 찾아가 결혼이주여성들의 모국어를 배우는 기회와, 그들에게 우리 문화와 생활방식 등을 가르치는 기회를 동시에 가진다. 이를 통해 더 넓은 세상과 만나고 자신과 다른 방식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잠시 중지되었지만 고흥 소록도 한센환우들의 생활공간 속으로 찾아들어간 학생들이 어르신들을 위해 말벗을 해주고 이런저런 섬김으로 봉사하는 것도 오랜 세월 이어져온 정명여고의 대표적 체험활동 중 하나였다.

정명여고 구성원들이 전남권역에서 적어도 특별활동 부문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근거는 확실하다.정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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