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종 목사(광주동신교회)

사랑의 샘물은 줄수록 채워집니다
나누는 순간부터 주님이 예비하신 참 행복과 자유를 누려

 

▲ 최우종 목사(광주동신교회)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우리나라가 광복 이후 1990년 후반까지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원조 액수를 현재가치로 계산하면 약 70조원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았던 우리나라가 2009년 11월 OECD 개발원조위원회의 가입심사특별회의에서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을 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원조를 받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부패한 정치와 낙후된 경제여건으로 아직도 여전히 원조를 받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원조를 받다가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에 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잡혀 죽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가지 못하도록 말렸습니다. 그때 바울이 죽음을 각오하고 아시아로 건너가 밀레도 항구에 도착하여, 며칠간 머무는 동안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전하는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따라 다니며 말씀을 듣거나 직접 배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울이 직접 인용한 기록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받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불러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주는 것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두드러진 특성은 자기중심적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 각 부문의 모든 사람들은 “너 자신을 주장하라, 너 자신을 선전하라, 그리고 너 자신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런 유형의 모토에 있어서 공통점은 모든 구호들이 자신에 대한 집착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지만물을 주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며, 날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입히시고 길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주시고 예수님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주셨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도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한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늘은 축복을 내린다. / 하나님은 태양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리하여 태양은 따사로이 우리를 지킨다. / 하나님은 달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래서 달은 우리가 가는 걸음을 은은히 비춰준다. / 하나님은 공기를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는 이 공기를 호흡한다. / 하나님은 땅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땅은 모든 열매를 제공한다. /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러나 인간은…’

시는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이 납니다. 인간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신분에 예수님의 이름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있기에,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복 중의 복인 것입니다.

2. 주는 자에게는 참된 기쁨과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받는 것이 표면적인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내면으로 승화된 기쁨입니다. 받는 것이 일시적인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영원한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자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죠지 피바디(George Peabody)라는 사람은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사회교육사업에 내어 놓으면서 귀한 체험을 고백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결단하고 내놓았을 때 재산을 모으는 기쁨에 비할 수 없는 신기한 쾌락과 기쁨이 있었다.”

의미 있는 고백입니다. 무엇을 베푸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참 기쁨을 우리 자신에게 선물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실험을 했는데, 학생들에게 봉사활동을 시켰더니 체내 건강지수가 많이 높아졌습니다. 또 죽음을 앞둔 말기 암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봉사에 대한 책만 읽게 했는데도 면역기능이 크게 올라갔다고 합니다.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해는 죽음의 바다요, 갈릴리는 생명의 호수입니다. 왜 사해가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까? 받기만 하고 줄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흘러 들어오기는 하는데 나가는 곳이 없습니다. 움켜쥐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릴리는 다릅니다. 북쪽 헬몬산의 눈 녹은 물을 요단강을 통해 받아들이고 사해로 흘러 보냅니다. 그 속에는 수많은 물고기가 뛰놀며, 주변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이 고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물을 내려 보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 15장 10절에서도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렇습니다. 남에게 주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들은 고통과 아픔을 적게 느끼고, 스트레스도 줄며,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며, 질병에도 덜 걸린다고 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의 뜻대로 주는 것을 실천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놀랍게도 주님이 예비하신 참 행복과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3. 주는 것을 통해 주님을 대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36절 이하에 보면 ‘마지막 심판 날에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준 사람,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준 사람, 나그네를 영접한 사람,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힌 사람, 병든 사람들을 돌아보았던 사람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소시민에게 한 것이 곧 주께 한 것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워오며 사랑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의 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샘은 주면 줄수록 다시 채워집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넉넉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의 샘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로 인해 여유로울 뿐 아니라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도록 쓰지 않으면 사랑의 샘은 점점 말라버리고 만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사랑의 샘은 어떻습니까? 바짝 말라있습니까? 아니면 가득 차 있습니까?

신명기 15장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요, 교회와 성도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출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의 최고 순간에 다다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가지고 있었느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주었느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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