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이다.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문을 닫은 중세(Middle Ages)는 476년 서(西)로마의 멸망과 야만족의 대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사가들은 중세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가 천도한 때인 A.D 338년이나 또는 600년대의 교황 그레고리 대제의 시대, 심지어는 800년대의 샤를마뉴 대제의 때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로마의 멸망을 중세의 시작으로 본다. 중세는 말 그대로 ‘중간의 시대’이다. 고대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16세기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전까지를 가리켰다. 중세유럽의 가장 큰 특징은 같은 신앙으로 기독교 사회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세 뿌리와 열매는 기독교였다.

로마제국의 말기에서 중세로 전환되는 혼란기에 두 인물이 있었는데, 한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로 우리가 어거스틴으로 부르는 사람이고, 또한 사람이 히에로니무스(Hieronimus, 345~420), 즉 제롬으로 이 두 인물은 중세 천년의 사상을 제공한 대교사들이었다.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함은 중세 최고의 군주인 샤를마뉴 대제가 그의 ‘신국론’을 통치 이상으로 삼은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중세는 많은 군주들이 하늘왕국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했던 시기이다. 중세는 한마디로 거대한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이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와 제롬은 중세가 아닌 고대 로마제국 말기의 인물이지만 이들의 철학과 신학은 천년을 지탱하는 기둥들처럼 중세사상의 기둥이 되었다.

354년 오늘날 알제리에 있는 타가스테(Tagaste)에서 이교도 아버지 파트리쿠스(Patricus)와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Monica)로부터 태어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16살 때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고 마니교에 심취한 탕아였다. 그런 그가 386년, 그의 나이 33세 때 집정원에서 어린아이의 노래 같은 신비한 음성을 듣는다. “집어 읽어라(tole lege)”였다. 이때 그는 즉시 자신 앞에 있는 성경을 펴들었는데,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으로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이었다. 이날 회심 후 387년인 그 이듬해 세례를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의 감독이 되어 430년 영면했다. 미국 역사가 토마스 카힐(Thomas Cahill, 1940)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마지막 고전 철학자’이자 최고의 중세학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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