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백년 미션스쿨, 여전히 찬란한 이름

▲ 학생 2명으로 시작한 배재학당은 132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15만명의 인재를 양성한 교육의 요람이 됐다.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선교사 동상

‘최초’의 은혜 감사하며 ‘최고’의 꿈 키워간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정신 아래 창의적 기독교 인재 양성 비전 이어나가

“지금 뭐 뭐하는 짓이야?”

1885년 한 여름. 코쟁이 선교사가 한양 정동 한복판에 있는 집을 허물고 있었다. 방 두 칸의 벽을 헐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지나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야소교 귀신이 들렸나봐.” “꼬부랑 말을 가르친다던데.”

주변의 수근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슬땀을 흘리던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며칠 뒤 코쟁이 선교사는 이겸라(李謙羅)·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했다. 때는 고종 12년(1885) 8월 3일, 이것이 배재학당의 첫 모습이다.

▲ 배재학당 초창기 학생들과 교직원

‘최초’를 쓰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는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최초를 만들어낸 선교사 중 한 명이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시작한 것이 바로 예배와 교육이다. 그가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이 1885년 4월 5일이고 그해 8월 3일에 배재학당을 연 것을 보면, 교육에 정말 남다른 사명감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배재학당 초기 모습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배재학당은 신교육과 신문화의 요람으로 근대교육의 효시가 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학당 초기에는 일정한 제복이 없다가 1897년부터 교복과 교모를 착용했다. 모자엔 태극을 상징하는 둥근 모양의 청홍색 선을 둘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남자교복이다. 이 교복을 입고 처음으로 수학여행도 갔다. 또 학칙이 처음 생겨난 곳도 배재학당이다.

2명으로 시작한 학교는 이듬해엔 20명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급하게 건물이 필요했다. 1887년 최초로 벽돌 교사를 지었다. 교육 내용도 최초의 것들이었다. 조선의 한문식 교육이 아니라 영어 한국 언문을 기본 교과목으로 하고, 학년에 따라 수학 과학 역사 지리 체육 음악 미술 의학 등을 가르쳤다. 특히 과학교육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됐다.

▲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 현판

최초의 교육은 최초의 인물을 배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 최초의 의학박사 오긍선,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한글학의 시초 주시경 등 열 손가락이 모자랄 판이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欲爲大者當爲人役(욕위대자당위인역). 서울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들어서면 첫 눈에 들어오는 문구다. 뜻을 그대로 풀면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배재학당에서는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고 말한다.

▲ 서울 정동에 위치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아펜젤러 선교사는 학교를 세우면서 欲爲大者當爲人役을 학당훈으로 삼았다. 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6∼28)라는 예수님의 교훈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당훈은 배재의 정신이요, 교육의 목표이며, 실천이고, 또 생활이 되었다.

배재학당에서는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복음을 의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생활에서나 가르치는 모든 학과에서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진리를 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 대전에 위치한 배재대학 전경

배재학당은 민족을 섬기는 공간이기도 했다. 1889년에는 한글 활자를 주조해 성경을 인쇄했으며, 1896년에는 <독립신문>을, 1897년에는 <조선 그리스도인의 회보>를 출판했다. 1898년에는 학생 기관지인 <협성회보>와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각각 발행했다. 1892년에는 목각으로 <천로역정>을 발행하기도 했다.

1920년 3월 2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700여 명의 학생은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배재학당을 ‘만세학교’라 불렀다. 이처럼 배재학당은 교육구국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다했고, 일제강점기 36년 동안에는 민족의식과 정의감을 굽히지 않고 용감히 항쟁했다.

▲ 우리나라 최초의 학칙

최초를 넘어 최고를 꿈꾸다

작은 방 두 칸에서 시작한 배재학당은 유치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운영하며 15만명의 인재를 양성한 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1886년 6월 8일 고종이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 되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130년 전 고종의 말이 역사가 되고 현실이 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다.

정동에 있던 배재학당은 동관만 남겨둔 채 전국으로 흩어졌다. 배재중학교와 고등학교는 1984년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했으며, 배재대학교는 대전에 위치해 있다. 유치원은 배재대학교 부설로 같은 교정에 있다. 현재 동관은 서울시 근대 건축문화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돼 보존 중이며,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머지 옛 학교터는 2004년에 배재정동빌딩으로 탈바꿈했다. 즉 정동에 가면 학교는 없고 박물관만 남아 있다.

이처럼 옛 건물은 사라졌지만 “기독교 인재를 세우고 섬기는 종이 되겠다”는 건학이념은 132년이 넘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 배재대학교 학생들.

배재학당은 이제 최초를 넘어 최고를 꿈꾸고 있다. 배재대학교 김영호 총장은 “아펜젤러 선교사와 하워드 선교사의 뜻을 더 큰 희망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배재대학의 발전목표를 ‘나눔과 섬김으로 행복한 자율생태대학’으로 삼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총장은 배재학당의 인재상도 제시했다. 그는 “실천하는 청년 아펜젤러를 양성하기 위해 전 구성원이 매진하고 있다”면서 △실천적 지성인 △전인적 감성인 △창의적 개척자를 미래 인재상으로 제시했다.

학교법인 배재학당 곽명근 이사장은 “우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정신으로 132년간 인재양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국가발전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발전을 거듭해 국민에게 사랑받은 명문 교육기관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이제 우리의 목표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대학들과 당당히 경쟁하는 것”이라면서 최초를 넘어 최고가 되는 믿음의 배움터가 되겠다고 밝혔다.

▲ 배재학당은 민족의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도 배재학당 출신이며, 민족시인 김소월도 이곳 출신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집(사진 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초창기 수업 모습(아진 아래).

“사람은 학교를 세우고 학교를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방 두 칸, 학생 2명이라는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한 배재학당은 그 이름처럼 민족의 인재를 기르는 신학문의 요람이 됐다.

배재인들의 가슴 속엔 조국사랑의 열정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는 19세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1년 뒤에는 배재학당의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는 일화도 있다.

한글학의 기틀을 마련한 주시경 선생도 배재학당이 낳은 선구자다. 배재학당을 졸업 후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국어교육에 힘썼던 그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 그도 배재 출신이다. 김소월이 문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다. 그는 ‘엄마와 누나야’ ‘산유화’ 등 전통적인 정서를 민족적 정감으로 표출한 민족시인으로 불린다.

이밖에 사회운동가 신흥우 박사,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의학의 선구자 오긍선 박사, 소설가 나도향 선생 등이 모두 배재의 가르침을 받은 신학문의 선구자들이다.

 

선교사 영향, 전인교육 집중하다

교가에 얽힌 이야기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로 시작하는 배재학당의 교가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 보통 교가라고 하면 “ㅇㅇ산 정기를 받아…”로 시작하지만 배재학당 교가는 “배재학당 노래합시다”가 가사의 전부다. 심지어 후렴구는 “라라라라 씨스붐바 배재학당”이란 말만 반복한다.
특별한 뜻도 없고 단조로운 이 노래를 듣는 사람마다 “이게 교가 맞아?” “무슨 응원가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그래서 인터넷 네이버에는 이와 관련 검색어와 질문이 줄줄이 달려 있기도 하다.

배재학당 교가가 응원가에 가까운 이유가 있다. 배재학당은 개교 때부터 전인교육에 힘을 쏟았다. 당시에는 전인교육이라는 말도 없었겠지만, 아펜젤러 선교사는 신앙교육과 함께 지식교육, 그리고 체육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1900년에는 정구반, 1902년엔 축구반, 1911년엔 야구반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육상반(1920) 빙상반(1922) 씨름반(1923) 농구반(1925) 유도반(1925) 역도반(130) 등 우리나라 근대 체육이 배재학당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교육관 때문인지 우리나라 최초의 홈런타자인 이영민(1905~1954)을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축구부도 중·고교 명문으로 남아있다. 이들은 시합 때마다 응원가에 가까운 교가를 부르며 흥에 빠진다.

‘씨스붐바’라는 용어에 대한 얽힌 이야기가 있다. ‘시스붐바(sis-boom-bah)’는 영어 단어로 응원할 때 외치는 일종의 구호다.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이겨라’라는 뜻이다.

시스붐바는 미국 남북전쟁 때 북부군의 구호였으며, 이후 미국 대학들의 응원구호로 번졌다. 뉴저지주의 드류대학 신학부를 다닌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구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편 연세대 응원가에도 시스붐바가 등장한다. 연세대를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가 뉴욕대학교, 뉴저지주 뉴브런즈윅신학교를 나온 것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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