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 주도 기독교, 독립운동 구체화 했다”

이만열 교수 “3·1 만세운동은 백성이 주인되게 한 혁명적 사건”

▲ 3·1운동 100주년 기념 준비 학술심포지엄에서 이만열 교수가 3·1만세운동에서 종교계의 역할에 대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3·1만세운동 전개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을 조명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지난 2월 23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이사장:윤경로 박사)는 1919년 3월 1일 당시 33인의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했던 태화관의 자리에 세워진 서울 안국동 태화빌딩 세미나실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준비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3·1만세운동과 종교계’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3·1만세운동이 종교계의 연대와 주도로 전개된 지점에 주목했다. 기조강연을 한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는 3·1만세운동에서 독립의 열망이 “지역과 남녀노소, 신분과 이념, 종교와 신앙의 벽을 넘어 혼연일체로 승화되고 있다”고 평가하며 3·1만세운동에 당시 종교계가 앞장서게 된 것에는 일제 강점 초기 강압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일제는 의병 등 조선인의 반제저항세력을 소탕하는 한편 기존의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의 시민의 기본권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아울러 무기를 압수하는 등 조선인의 저항수단도 제거해 갔다. 일제 무단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봉건적 신체형인 태형을 부활시키고 범죄즉결령도 실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유지되는 합법적인 공간은 종교적인 행사밖에 없었다. 3·1만세운동이 종교계에 의해 선도된 것은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밝혔다.

또한 3·1만세운동이 태동하기까지 각 종교단체의 독립운동 시도가 3·1만세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며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룹으로 천도교와 기독교 측을 들 수 있는데, 해외독립운동자들과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간파한 두 종교계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을 구체화 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3·1만세운동은 한말 이래 여러 갈래로 산만하게 흩어졌던 민족주의 흐름을 하나의 물줄기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새로운 동역으로 만들어 민족주의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즉 3·1만세운동은 민족주의의 여러 지류들을 모아 통합된 에너지를 창출하는 구실을 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3·1만세운동은 이전의 국권회복운동이 왕조 회복을 위한 일종의 복벽 운동이었던 것과 달리,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의 토대 위에 대한민국을 건립’하고자 하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이 교수는 “3·1만세운동은 그 해 4월 11일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 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3·1만세운동은 선진들이 이미 사용해 왔던 ‘3·1혁명’이라는 용어로 대체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본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3·1만세운동 준비 단계에서 종교연대 및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있어 기독교의 역할을 국내외 당시 기독교 조직의 측면에서 접근했다. 이 교수는 “3·1만세운동은 일본의 한국 침략과 지배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운동이자 자주권 확보를 위한 민족적 항일 투쟁이었음에도, 그 운동의 전개와 확산 과정에서 종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두를 열었다.

“3·1만세운동 준비 과정에서 종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3·1만세운동의 핵심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대표들로 구성됐으며, 독립선언 이후 서울과 지방에서 전개된 대중 투쟁 단계에서 종교인과 종교 조직이 운동의 전개와 확산과정에 촉매와 연락망이 되었고, 그 결과 만세시위에 참여한 종교인과 종교 조직이 일본 경찰 및 사법 당국의 집중적인 견제와 탄압을 받아 종교 박해의 양상을 띠었다는 점에서 3·1만세운동에서 종교적 민족운동 또는 종교저항운동의 성격과 의미를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이 3·1만세운동 당시 서울과 지방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3·1만세운동 이전에 서울과 지방을 이어주는 전국적인 연락망 및 조직망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18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독교(개신교) 선교는 선교사를 파송한 서구의 교파형 교회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장로교와 감리교가 주도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는데, 미국북장로회 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미국북감리회 남감리회의 선교회는 서울과 지방도시 거점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복음전도와 교육, 의료 활동을 펼쳤다”고 정리했다.

따라서 한국교회 목회자와 전도자들은 선교회 및 선교부 단위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전도와 목회, 교육과 사회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강제합병 이후 정교분리 원칙을 위하며 일제 통감부 및 총독부 관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선교사를 배경으로 한 교회는 상대적 자율성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교회나 기독교 학교 안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주의 토론이나 민족운동 논의가 가능했다.”

특히 당시 서울에서는 미감리회와 남감리회가 연합하여 감리교 선교백주년 기념집회를 비롯해 초교파적으로 운영되는 주일학교와 기독교청년회, 예수교서회, 세브란스병원과 연희전문학교 등이 있어 이들 초교파 조직과 기관들을 통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교역자들의 만남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와 정보 교환 및 동지 포섭이 시작됐다. 이 교수는 “이런 기독교 조직과 집회를 배경으로 한말 때부터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라는 주제로 개편을 시도하는 새로운 국제적 시대환경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소통하며 연대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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