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동은 양반과 평민 사이에 끼어 있던 중간층인 서얼과 기술적 중인에게도 나타났다. 당시 양반 사회에서 가장 큰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이 서얼이었다. 서얼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양반 남성이 양민 첩에게서 낳은 자식을 서자라고 불렀다. 또 천민 첩에서 낳은 자식은 얼자라고 불렀는데 이를 합쳐서 서얼이라고 했다. 이들은 아버지 벼슬의 높낮이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관직에 오르곤 했다. 1851년 ‘신해허통’으로 서얼이 청요직 진출이 이뤄지기까지는 서얼들의 꾸준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사회에서 투쟁은 집단 상소가 그 방법이었다. 조선시대 청요직은 말 그대로 청렴하고 중요한 자리란 뜻으로 대체로 삼사(三司)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조선 중기인 제14대 선조대에는 1600명의 서얼이 억울함을 상소했는데 당시 선조대왕은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은 곁가지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말로 서울의 벼슬 진출 길을 넓혀주었다. 제16대 인조대에는 서자는 손자대에 얼자는 증손자대에 가서 과거를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삼사나 세자 시강원 같은 요직에는 오를 수 없게 했다. 22대 정조대에는 개혁군주답게 그의 강한 의지가 작용하여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이 중요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해허통 이후도 여전히 서얼들과 일반 양반 사이 차별은 여전하였다. 이렇게 서얼들은 조선 초기 서얼금고에 의해 전문 기술직 외에는 벼슬길이 법제적으로 막혀 있었다. 서얼과 함께 기술직 중인들도 신분차별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신해허통이 있던 1851년 1800명의 기술직 중인들도 대대적 연합을 통해 누적된 불만을 표출하였다. 하지만 그 세력이 미미하여 청요직 진출에는 실패한다. 당시 중인들은 경제력이 뛰어나 양반들과 어울리며 시서화를 통한 문예활동으로 인문교양을 쌓아갔고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 나갔다. 이들이 바로 유대치나 이경석 같은 개화파의 한 주류들이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