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익 목사(창성교회, 순교자기념사업부장)

 

▲ 함성익 목사(창성교회, 순교자기념사업부장)

고대 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말했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고, 일제시대 때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주기철 목사와 함께 많은 분들이 순교를 하였다. 지난 1861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씨앗이 되어 널다리골교회가 되었고, 이 교회가 1907년 부흥을 이끈 장대현교회의 전신이며, 지금의 한국교회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는 짧은 기독교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분명 이것은 한국교회에 자랑이며 우리 후손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선교는 다양화 되고 있다. 정식으로 선교 훈련을 받고 총회세계선교회 파송을 받는 사람도 있고, 신분은 예장합동 소속이지만 GMS가 아닌 다른 선교단체 소속으로 파송 받아 선교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청년들을 중심으로 단기선교를 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부름 받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선교지에서 생명을 바친 젊은 선교사 부모들이 목숨을 잃은 자녀를 순교자 반열에 서도록 노회를 통해 순교자 등재 청원을 한 적이 있다. 비록 육신은 헤어졌지만 선교지에서의 죽음을 기리고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전도하러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어떤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다가, 또 어떤 사람은 오지에 들어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또 의료선교 봉사 중 풍토병으로, 때로는 폭우와 쓰나미 같은 재난으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참으로 귀한 죽음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유가족들은 순교자 반열에 등재 요청을 한다.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좀 더 심사숙고 하여 살펴보면 엄밀히 말해 이것은 순교라기보다는 순직이다. 그럼에도 교회의 정서상 이 같은 죽음에 대해서도 순교자로 부르고 싶은 것이 유가족들의 마음일 것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순교(殉敎)는 “모든 억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신앙하는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순직(殉職)은 “직무를 위하여 목숨을 잃음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순교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이를 증언하다가 그 일로 인하여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되, 타협이나 배교로 죽음을 피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반면 순직은 자신의 복음 사명에 충실하다가 죽었더라도 그것이 외부세력에 의한 박해가 아닌 사고나 천재지변으로 인한 죽음의 차이일 것이다. 이처럼 순교는 죽음을 피할 수 있음에도 목숨을 바친 것이며, 순직은 자신의 임무를 감당하다 목숨을 바친 것이다.

우리가 선교사 파송 때에는 화려하게 파송을 하고, 파송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선교지에서의 죽음, 순직에 대해선 그리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형편이다. 바라기는 우리 총회와 GMS에 순교자 명부만 기록 할 것이 아니라 순직자 명부도 더불어 기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거나 타인의 불법행위로 입은 사고, 혹은 예측 못한 상황에서 사고, 재난현장에서 구호활동을 벌이다가 목숨을 잃는 순직에 관해서도 필자는 총회가 순교자 등재와 아울러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바다. 또한 1년에 한번씩 순교자 유가족이 조촐하게나마 위로회를 갖듯이 순직자 유가족도 순교자 유가족과 더불어 위로회를 한다면 그들의 숭고한 순직과 헌신이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며, 유가족들은 다소라도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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