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야마씨 “기독교, 천황제 이데올로기 강제하는 도구로 악용돼”

“숙명여학교(현 숙명여대) 설립과 운영의 목적은 일본제국의 조선 식민지화와 그에 협력한 일본 기독교계의 조선전도론의 흐름 속에서 달성된 하나의 사업이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장규식) 제353회 학술발표회에서 ‘숙명여학교 설립 운영 과정 속의 일본 기독교 - 통감부 조선총독부와 관련성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한 가미야마 미나코(간세이 가쿠인대학 신학연구과 박사과정)의 주장이다.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가미야마 미나코 씨가 숙명여학교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일본기독교의 역할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가미야마 씨는 “숙명여대 측에서는 숙명여학교가 대한제국 황실 유지가 설립한 조선의 첫 민족 사립학교임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기독교인 후치자와 노에가 1906년 숙명여학교의 창립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후치자와 노에는 1905년 조선에 애국부인회 조선지부 설립을 목적으로 입국했다가,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한 혐의로 추방됐다. 이후 다시 조선에 돌아와 통신사 사장을 맡고 있던 키쿠치 켄조의 도움을 받아 1906년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생모인 엄비를 만난 후 숙명여학교 설립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엄비는 영친왕의 안위를 목적으로 숙명여학교 설립에 찬동해 후치자와에게 의뢰하는 형식으로 숙명여학교 설립을 진행했지만, 실제 설립 및 운영은 주로 일본조합기독교회, 통감부, 조선총독부 등 조선 식민지배에 앞장섰던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 결과, 초기 숙명여학교는 철저히 일본식 교육의 장으로 오직 일어만을 사용하는 교육이 진행됐다. 후치자와가 기독교인이기는 했으나, 기독교 정신에 따라 조선어와 영어로 수업이 진행됐던 이화학당이나 정신여학교 등과 달랐다. 숙명여학교에서 기독교는 “학생들에게 일본 천황과 국가를 위한 모성성을 강조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강제하는” 도구로 악용됐다. 즉 숙명여학교는 총독부 방침대로 일본의 조선 통치에 용이한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러한 사실은 숙명여학교가 설립 당시부터 통감부가 시작한 관립여학교와 같은 위치에 놓여 특별한 관심과 관리를 받았고, 일본의 여러 화족들에게 기부를 받았던 기록 등이 구체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가미야마 씨는 “외국의 자본에 의존함 없이 오직 우리 힘으로 일으킨 민족 여성 교육의 효시라고 주장하는 숙명여대의 공식 입장과 달리, 그 설립 과정에 확실히 교풍회, 조합교회, 통갑부, 조선총독부의 조언과 원조가 존재함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회에 참석한 학회원들은 그동안 기독교사적 관점에서 고찰되지 않은 숙명여학교 설립과 운영의 의미를 일본 식민지 지배와의 관계성 속에서 새롭게 평가할 필요 가 있다는데 동의했다.

논찬자로 나선 윤정란 연구원(서강대 종교연구소)은 “1905년 을사강제조약 이후 교육구국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 상황 하에서 이를 막기 위한 식민지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그 담당자로 후치자와가 선택돼 조선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후지자와 노에가 설립 당시 학감이었다가 1911년 8월 제1차 조선교육령 공포 이후 설립자이자 재단 이사 등으로 승격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독교역사학회는 3.1운동 98주년을 앞두고 오는 2월 23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빌딩 대강당에서 3.1만세운동에 대한 학술심포지엄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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