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따라가면 교회사가 보인다

가족·성도들과 동행하는 역사의 현장 … “걷다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요”

건강한 목회를 위해서는 건강한 여가생활이 필수다. 쉼과 재충전이 없이는 열정도, 보람도 나오기 힘들다. 하지만 목회자는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여가생활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은 이런 목회자들에게 ‘도보여행’을 추천한다. 정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몸을 직접 움직이기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최석호 소장은 “도보여행은 건강에도 좋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다니면서 지역의 역사를 배운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며 “가족, 성도들과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며 걷다보면 동행자와 유대관계를 쌓는 것은 물론 지역의 숨겨진 보물을 찾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름다운 관광지과 유구한 기독교 역사가 공존하는 도보여행 추천지 세 곳을 소개한다

▲ 서울 정동에 위치한 구 러시아공사관

서울 정동

서울 중구 정동은 한국 기독교의 시작과 구한말 쇠락해가는 나라의 모습이 공존하는 곳이다. 갓 스물 일곱 살에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 여성 교육에 뜻을 품었던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이 지척에 있다.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첫 예배를 본 곳도 정동이다. 캐나다대사관 앞 도로 어디쯤으로 추정하는 정동 13번지 한옥이 그곳이었고, 곧 이전하여 세운 새문안교회도 바로 길 건너에 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사이 언덕 기슭에는 조선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도 찾아 볼 수 있다. 1980년대 화재로 손실이 있었고 크고 작은 증축이 있었지만 원래 건축물에 큰 훼손은 없다.

덕수궁 북쪽 돌담길 건너편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역시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성당을 장식한 십자가와 성물들은 모두 영국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1926년 자금사정으로 미완인 채 공사를 끝냈다가, 1996년 최초 설계에 거의 근접한 모습으로 완공됐다. 처음 이 성당 건축을 주도했던 트롤로프 신부의 무덤이 성당 지하에 있는데,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 현재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배재학당 동관

덕수궁 돌담길이 끝나고 분수대를 지나면 정동극장 앞 골목 남도식당 뒤로 커다란 철문이 있다. 그 뒤로 보이는 붉은 벽돌 2층 건물은 중명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으로 넘기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됐다. 중명전에서 예원중학교를 넘어 북동쪽 160m 거리 언덕에는 하얀 탑이 있는데, 옛 러시아공사관이다. 한 나라의 왕이 아들과 함께 다른 나라 대사관으로 피난한 전대미문의 사건, 아관파천이 벌어진 현장이다. 경복궁에 살던 고종은 1896년 이곳으로 피신해 만 1년을 살다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최근 세워진 정동극장, 경향아트힐, 이영훈 작곡가 노래비까지 둘러보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정동만의 분위기에 쉽게 녹아든다.

▲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지였다. 목포에 세워졌던 일본인교회. 현재는 한 마트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목포 개항장

목포는 자주적으로 개항한 첫 번째 항구로, <목포의 눈물>로도 유명한 흥과 한이 공존하는 곳이다. 목포역에서 근처 호남로를 따라가면 정명여학교, 양동교회, 양관 등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멋진 건물들이 이어진다. 양동교회는 유진 벨 선교사가 1897년 초가집 부지에서 시작한 곳이다. 양동교회 교인과 정명여학교 학생들, 그리고 영흥학교 학생들은 4.8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조국 독립에 힘을 보탰다. 이들은 교회 지하실과 학교 기숙사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했다.

▲ 중명전

대반동 부광상회 아래 골목길을 걸어가면 신안비치호텔이 보이는 해양대학로에 도착한다. 이 오른쪽에 위치한 공생원은 윤치호 전도사가 고아들을 돌보던 곳이다. 윤치호 전도사는 고아들에게 먹일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안타깝게 실종되고, 그의 일본인 아내 윤학자 사모는 계속 남아 3000여 명에 달하는 고아들을 길러냈다.

유달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에서는 귀한 글과 그림, 도자기가 가득한 성옥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추사 김정희, 그에게 그림을 배운 석파 이하응과 운미 민영익의 작품이 생각지 못한 이곳에 숨어있다. 성옥기념관 바로 뒤에는 남도문화재로 지정된 이훈동가 정원이 있다. <장군의 아들> <모래시계> 등의 촬영지로, 아는 사람만 입소문을 통해 찾는 곳이다.

▲ 과거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었고, 초량교회

이훈동가 정원에서 다시 도로를 따라 걷다가 마트 앞에서 도로를 건너 골목길로 들어서면 일본인교회였던 적산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개항장에 살던 일본인들이 세운 교회다. 이밖에도 이순신 장군의 유적으로 남은 고하도는 일제 자살특공정을 배치한 신요격납호가 있던 곳으로, 역사의 희비가 교차하는 장소다.

부산 개항장

부산은 근대화 이전부터 외국인들이 드나든 국제도시이자,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 해운대, 국제시장 등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골목골목마다 유난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부산역 반대방향 백제병원 윗 도로를 건너 좁은 골목길 계단으로 올라가면 초량교회를 볼 수 있다. 베어드 선교사가 부산선교기지를 구축하면서 개척한 한강 이남 최초 교회다. 1891년 제물포항에 도착한 베어드선교사는 1892년 영서현교회를 시작한다. 영주동으로 옮겨 영주동교회라 했다가 1922년 재건축하면서 초량삼일교회라 고쳐 불렀다. 삼일독립운동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부산 독립운동과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 부산근대역사관

부산에서는 장기려 박사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1956년 송도 언덕배기 만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 장기려 박사가 사역했던 곳이다. 장기려 박사는 이곳에서 가난한 환자들의 월급을 대납해주며,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모델이 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만들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대안 마련에도 적극 나섰다.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 쌀을 일본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조선의 국유지를 자본으로 세운 일제의 국책회사다. 1945년 해방 후에도 미국에서 47년간 이 건물을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1996년이 되어서야 우리나라에 반환했다. 2002년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문을 열게 된 이곳은 부산 사람들에게는 수탈의 상징이기도 하고, 자주 독립으로 가는 시민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 양동교회는 4·8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다.

부산에 왔으니 먹을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전쟁 때 각지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좌판을 벌여 만든 국제시장, 부산의 대표 음식 어묵으로 유명한 부평동시장, 각종 해산물을 판매하는 자갈치시장까지 돌다보면 눈과 입을 모두 만족시키는 부산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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