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 목사(열린교회·총신대 교수)

늘 새롭게 하시는 주를 믿으며 소망의 새해 맞이합시다
하나님과 평화 누리며 영광 돌리던 조국교회의 ‘옛적’ 그리워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하)

▲ 김남준 목사(열린교회·총신대 교수)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 옷, 새 학년, 새 직장, 새 사업…. ‘새’자가 붙은 말은 왠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아마 새롭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행복을 기대하게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았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이 달력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행복은 그분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 속에 새해를 맞이하며, 약 2600년의 세월을 가로지르며 들려오는 예레미아의 슬픈 노래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슬픔이 꺾지 못한 희망

예레미야애가는 말 그대로 ‘예레미아가 부른 슬픈 노래’입니다. 탄식으로 시작되는 이 거룩한 노래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면서 지은 눈물의 시입니다. 선지자의 평생 소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목격하게 된 현실은 바벨론에 함락된 채 기근과 공포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왕하 25:1~3, 애 1:11).

그러나 이 노래는 슬픔만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선지자는 한때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여 주었던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처참하게 짖밟히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했습니다(애 3:23). 우상 숭배와 불신앙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뼈아픈 광경을 목도하면서도 슬픔속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서 참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은혜의 열심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는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절망과 슬픔이 이기지 못한 희망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애 5:19). 그리고 이스라엘이 옛적을 회고합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그가 회고한 ‘옛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던 때,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던 때였습니다(호11:1).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이스라엘의 역사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선지자가 그리워하고 있는 ‘옛적’은 단지 시간적인 과거가 아닙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샬롬의 삶을 누리던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방의 빛’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사42:6).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레26:12). 한때 이스라엘은 그 사명대로 온누리에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보여줌으로써 ‘이방의 빛’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취하던 때, 다윗의 치세에 하나님을 경외하던 때 등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던, 선지자가 그리워하는 ‘옛적’이었습니다.

교회의 사명

이스라엘의 가장 큰 사명은 자신들의 존재와 삶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많은 열방 가운데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천하 만민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성취하기 위해 율법과 말씀이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창18:18,사2:3). 그리고 이제 이 사명은 신약의 교회가 이어받게 됩니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목마르도록 그리워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독교인의 수나 교회 건물의 크기가 아닙니다. 이 나라의 기독교인 고관대작들의 숫자도 아닙니다.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항력은 교인들의 숫자가 아니라 교회의 순수성입니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은 등대와 같습니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길 잃은 배들을 안전하게 항구로 인도하기 위해서 온 바다를 조명탄으로 밝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 속에 밝게 빛나는 하나의 등대로도 충분히 거친 바다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배를 향해 안전한 항구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 동안 우리는 은혜의 부흥을 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조선 땅에 들어온 이래 기적적인 은혜가 늘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 비록 일제강점기와 민족상잔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지나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복음은 흥왕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가 일군 기독교 신앙의 만개는 민족적 시련 속에 핀 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시련을 딛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두 가지 국가적 성취를 일구어 냈습니다. 바로 민주화와 경제발전입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들의 통치 아래서 ‘축복-타락-심판-회개’의 패턴을 지루하게 이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소명을 이루도록 주신 축복 속에서 교만하고 방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의 시대에 누리던 교회의 영광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세상의 영광을 좋아하고, 십자가의 정신을 따르기보다는 현대사회의 정신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옛적’은 지나가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드디어 교회의 담장마저 넘고 있습니다. 지난 세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나쁘고 악의적인 평판들이 교회를 향해 퍼붓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러한 비난들 중 어떤 것들은 근거 없는 것이지만, 또 어떤 것들은 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과 같이 악인들의 비난에도 진실은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와 정부는 서로 다른 영역을 섬기는 주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과거처럼 정권에 시녀처럼 굴복하거나 그 특권의 부스러기들을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교회는 선지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부가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국가를 올바르게 통치하도록 감시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자신을 돌아보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원리와 정신을 따라 성결과 의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치열하게 점검해야 합니다(눅1:75).

역사적으로 위대한 부흥의 때에는 언제나 교회의 ‘옛적’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교회의 가난함과 ‘옛적’의 부요함을 비교하며, 자기의 시대가 잃어버린 영적인 부요함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며 기도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옛적’에 대한 신령한 그리움의 깊이가 바로 그들이 올린 기도의 깊이였습니다.

죄를 책망하고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교회에 다시 ‘옛적’의 고상한 가치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영광이 교회와 온땅에 가득하기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던 조국교회의 ‘옛적’을 그리워하며, 우리 모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시다(히4:16).

다시 새롭게 하소서

이스라엘이 “옛적 같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의 교회의 부흥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선지자는 그렇게 새롭게 되어야 할 대상을 “우리의 날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천지만물 중 단 하나도 당신께 영광 돌리지 않아도 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교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역들, 곧 정치, 경제, 사회, 법률,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그러므로 그 가운데 잘못된 질서가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고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일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그 질서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새롭게 하심으로써 이 모든 세상의 영역들에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으나 이는 그들을 순결하게 하심으로 더 큰 영적 번영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징계의 슬픔이 희망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지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올 한 해,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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