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순교신앙은 오늘과 닿아 있다
선교사들의 무덤 아닌 정신 관리하는 곳

헌신과 희생 묵상하며 새로운 출발 다짐

한강을 타고 달려온 칼바람이 머리를 쭈뼛 서게 하는 겨울 한낮에도 양화진을 찾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단체로 찾아오는 탐방객들 외에도 개인적으로 혹은 지인들과 삼삼오오 짝을 이뤄 묘원을 둘러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양화진은 순교유적지를 찾아가는 긴 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본격적인 방문객 집계가 시작된 2006년 9월부터 2014년까지 양화진을 찾아간 이들의 숫자는 50만 명에 이른다. 초창기 수천 명에 불과하던 연 방문인원은 어느새 7~8만 명을 헤아리는 수준으로 훌쩍 커졌다. 머잖아 누적 방문자 수가 1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 겨울햇살이 내리쬐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아픔인 듯 은총인 듯 서럽고도 감사하다.

외국인 방문자들의 비율이 높아진 점도 눈에 띈다. 고인의 유족이나 지인들 외에도 외국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이나 한국교회를 공식 방문하는 해외교회 대표들의 모습도 이곳에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연 20여 차례 진행되는 학술대회나 국제행사도 외국인들을 양화진으로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토록 수많은 이들이 오가는 중에도 이 공간에는 잠잠한 분위기가 감돈다. 묘원을 안내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속삭이듯 들려주는 소개말이나, 곁을 지나는 도로와 지하철 2호선 차량들의 소음만이 잠깐씩 적막을 깰 뿐이다.

“양화진은 관광지가 아닙니다. 방문자들에게는 경건하고 정숙하게 묘원을 둘러보시도록 요청합니다. 무엇인가를 사고파는 행위도 일체 금지됩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위한 사랑과 희생을 묵상하는 구별된 장소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재단 백시열 사무국장은 양화진을 찾는 이들에게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묵상하며, 그들의 죽음이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해보도록 권면한다. 양화진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관리하는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청일전쟁의 혼란기에 한국 땅을 찾아와 의료선교사로 헌신하다 3년 만에 세상을 떠난 윌리엄 홀, 남편의 뒤를 이어 45년간 한국에 머무르며 병원과 의학학교를 세우고 한글점자를 개발하는데도 공헌한 아내 로제타 홀. 양화진 홍보관에서는 이들 부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로제타 홀의 일기>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로 소개되는 중이다.

어디 홀 부부의 스토리뿐이랴. 천대받던 백정들을 한국교회의 기둥들로 변화시키며 승동교회를 일으킨 사무엘 무어, 독립운동에 앞장선 배재학당 제자들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벙커, 한국 고아들을 위해 일생을 투신한 소다 가이치,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하디 등 양화진에 묻힌 인물들마다 하늘나라 생명책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아름다운 사연들이 빼곡하다.

그 사연들은 오래된 무덤과 낡은 비석을 뚫고 나와 생전의 친분도, 일면식도 없던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가슴을 후벼 판다. 믿음의 후예들은 모두 채무자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 하셨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사랑의 빚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민족은 문맹의 벽을 깨기까지, 숱한 질병들과 신분장벽 남녀차별을 극복하기까지, 그리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발견하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허비해야했을까.

사명으로 걸어간 길이고, 직함을 가지고 받아들인 죽음이기에 그들에게는 ‘순직자’라는 칭호가 부여되지만, 복음의 제단 앞에 자신의 생명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쳤던 그들의 생애를 공식적인 ‘순교자’들보다 절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양화진을 한국교회의 위대한 순교유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 거친 파도를 뚫고 한국 땅을 찾아온 선교사들의 행적을 상징하는 양화진홍보관의 입구장식.

겨울 해는 짧다. 봉사관의 안내자들을 따라 소개영상을 관람하고 묘역을 둘러보며, 양화진홀의 전시물들까지 견학하고 나니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퇴장을 서둘러야 할 시간임에도 G구역 ‘어린이무덤’에 멈추어선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세상에 허망한 죽음이란 없는 것, 어제의 누군가가 걸어간 헌신과 희생 위에 우리의 오늘이 있는 것처럼, 우리 또한 순교적인 각오로 다음세대를 위해 그리고 지구촌의 누군가를 위해 내일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 양화진의 수많은 무덤들은 그것을 웅변하고 합창한다.

누군가는 양화진을 한국교회의 출발이라, 용인 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을 한국교회의 완성이라고 표현한다. 혹시 우리의 여행 순서는 앞뒤가 바뀌어버린 것일까? 상관없다. 어차피 여행의 끝은 다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니. <끝>

양화진은 지리적으로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 송파진과 함께 오진(五津)을 이루며 주요한 나루터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인천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해상 통로의 전진기지로서 서울의 관문 역할을 담당한 곳이다. 1885년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도 복음을 전하는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중요한 지역으로 이곳을 활용했다.

양화진이 선교사 묘역이 된 것은 1885년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인 헤론이(J. W. Heron)이 1890년 7월 28일 병으로 순직하여 이곳에 묻히면서 비롯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 일대에는 선교사와 부인 그리고 자녀들은 물론이고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들까지 숨진 후 묻히는 공동묘지가 되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현재 기념재단)가 1986년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서울시로부터 선교사 묘원의 관리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국내 거주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중심이 된 서울유니온교회가 이곳에서 예배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묘원의 본격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진 것은 협의회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세우면서였다. 100주년기념교회는 묘원을 관리하면서 방문객들을 안내하고 홍보하는 일도 담당했다.

▲ 양화진홀에 전시된 선교사들의 유품.

선교사 묘원에는 언더우드 및 아펜젤러 선교사와 그 후손들, 숭실대학 설립자인 베어드의 두 아들,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헌신한 에비슨의 두 아들, 의료선교사로 헌신한 홀 선교사 가족 등이 묻혀있다.

특히 미국 남장로교 소속 최초 선교사로 1892년 내한한 레이놀즈 선교사는 이듬해 낳은 첫 아들을 양화진에 묻었다. 1894년에 한국 땅에서 태어난 레이놀즈 선교사의 차남 존 볼링은 1920년 교육선교사로 돌아와 사역하며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70년에 소천한 후 형이 묻힌 양화진에 안장됐다.

또한 안동지방 최초 선교사였던 웰본(오월번) 선교사는 1928년 순직한 후, 앞서 숨진 자신의 남매와 함께 이곳에 묻혔다. 그리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인물로 알려진 헐버트 선교사는 1907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해방 이후 한국에 돌아와 1949년 8월 5일 소천한 후 양화진에 안장됐다.


전국의 선교사 묘역

양화진은 서울에만 존재하는게 아니다. 전국 곳곳에는 양화진처럼 이 땅으로 건너와 복음의 빛을 밝히며 살아가다 마침내 이 땅에 묻힌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역이 조성되어있다. 대표적인 4곳을 소개한다.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
호남신학대학교 뒤편 양림동산에 세워진 묘역에는 광주선교를 함께 시작한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와 클레멘트 캐링턴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의 묘소를 비롯해, 가난한 환자와 여성 고아 등을 목숨 바쳐 섬겼던 엘리자베스 쉐핑(한국명 서서평) 선교사 등 23명이 자신들의 뿌린 수고의 열매인 수피아학교 광주기독병원 양림교회 등을 내려다보며 잠들어있다.

▲대구 은혜동산
대구제일교회와 동산병원이 세워진 청라언덕에 조성되어있다. 신명학교를 설립해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된 마르타 스코트 부르엔 선교사, 부부선교사로 내한했다 신혼의 젊은 나이에 숨진 체이스 크로포드 사우텔 목사,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동산병원에서 일반외과 의사로 사역한 존 해밀튼 도슨 등과 선교사들의 어린 자녀 등 14명의 묘소가 안장됐다.

▲전주선교부 남장로교선교사 묘원
전주 예수병원 맞은편 언덕에 마련된 묘역에는 호남선교의 개척자인 미국 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 중 한 사람이었던 리니 데이비스 해리슨, 구암교회 영명학교 등을 세우며 군산 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매클리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와 그 자녀들, 예수병원 설립자인 마티 잉골드의 어린 딸 등의 묘소가 있다.

▲창원 호주선교사묘역
경남성시화운동본부가 부산과 경남 일대에 흩어져있던 호주 출신 선교사 8명의 시신을 모아 2009년 마산공원묘지에 다시 안장한 묘역이다. 부산 땅을 밟은 최초의 호주선교사였던 조셉 헨리 데이비스, 마산 의신여학교 초대교장을 지낸 아이다 맥피, 통영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섬긴 윌리엄 테일러 등이 묻혀있다. 묘역 인근에는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이 함께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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