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양림동산 첫 성탄예배
‘사랑의 열매’가 끝까지 지켜봤다


양림동선교역사마을은 호랑가시나무의 군락지
선교사 삶과 닮아 ‘예수나무’로 불리며 사랑 받아
소망과 아픔의 역사 간직한 넓은 쉼터 역할 다해

▲ 호랑가시나무의 푸른 잎과 붉은 열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새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 성탄 장식으로 애용되곤 한다.

“이 도시의 첫 번째 예배가 1904년 눈이 내리는 성탄절에 벨 선교사 가정의 임시 사택에서 열렸다. 식당의 탁자는 한쪽 구석에 옮겼고, 의자들은 침대위에 높게 쌓아놓았다. 예배 광고가 만들어졌고, 선교사들은 누가 나타날지 모르지만,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길게 줄을 지어 하얀 옷을 입고, 길을 따라서 올라오고 있는 한국인들을 보고 선교사들은 기쁘고 놀라웠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큰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고야 만 것이다! 여성들은 한 쪽 방에 앉았고, 남성들은 다른 쪽 방에 자리를 잡았다. 벨 선교사는 그 사이에 서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했다.”

조지 톰슨 브라운 선교사는 <미션 투 코리아(Mission to Korea)>라는 이름의 문서를 작성하며, 양림리교회에서 이루어진 최초 예배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1904년 12월 25일은 광주교회의 공식적인 첫 예배이자 성탄행사가 열린 날이다.

며칠 전 추위와 거센 풍랑을 뚫고 광주에 도착한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과 클레멘트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 그리고 그들을 돕고 있던 김윤수 집사와 변창연 조사의 가족 등 40여명이 모여 예배했고, 바깥에는 낯선 서양인들을 구경 온 200여명의 동네 사람들이 둘러서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함께 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죄다 목격한 또 다른 존재들이 있었다.

▲ 해질녘 양림동 호랑가시나무길을 작은 전구들이 마치 별빛처럼 불밝히고 있다.

한 겨울의 스산한 대지나 차디찬 눈발 위에서 더욱 푸른빛을 띠며, 탐스러울 정도로 붉은 열매를 자랑하는 호랑가시나무. 성탄트리나 크리스마스카드 장식물로 즐겨 등장하고, 오늘날에는 불우이웃돕기의 상징인 ‘사랑의 열매’로도 잘 알려진 바로 그 나무가 증인들이다.

광주를 찾아온 선교사들의 사택이 건축된 양림동 일대는 호랑가시나무의 군락지였다. 잎사귀에 난 다섯 개의 뾰족한 톱니가 호랑이의 발톱을 닮았다거나 몸이 가려운 호랑이의 등긁개로 사용됐다는 속설 등으로 특이한 이름이 붙여진 이 나무는 사실 서양 사람들에게도 친숙하다.
고대로부터 유럽인들은 호랑가시나무(holly)에 ‘성스러운(holy)’ 힘이 있다고 믿으며 소중히 여겼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 집안에 이 나무를 심는 풍습이 생기기도 했다. 특히 성탄장식으로 호랑가시나무가 즐겨 사용된 데는 유명한 전설 하나가 얽혀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머리의 가시면류관이 몸에 박히자, 로빈(유럽울새)이라고 불리는 작은 새가 날아가 부리로 그 가시들을 뽑다가 그만 가슴이 단단한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 사이에 로빈이 좋아하는 호랑가시나무의 열매를 성탄장식으로 쓰는 풍습이 생겼고, 붉은 열매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존재처럼 여기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 광주 양림동산에 군락을 이룬 호랑가시나무는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의 역사를 지켜본 증인이다. 사진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때문에 낯선 세계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외롭고 고된 사역을 준비하던 선교사들에게 양림동 일대에 널린 호랑가시나무는 반갑고도 사랑스러운 존재였을 것이 틀림없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고국에서 가져와 옮겨 심은 흑호두나무 플라타너스 은단풍처럼 호랑가시나무에도 아낌없는 애정을 쏟았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호랑가시나무에 ‘예수나무’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호남신학대학교 송인동 교수는 “양림동산 일대는 오래 전 죽은 사람들을 갖다 버리거나 나무에 매어놓는 풍장(風葬)터로 사용되던 황량한 지역이었으나, 선교사들이 들어와 예쁜 집을 짓고 나무들을 가꾸며 점점 아름다운 숲으로 변모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송 교수는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새들의 양식이 떨어지는 겨울철에 훌륭한 먹이가 되고 있다며, 야위어가는 생명들을 살리고 번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이 나무가 마치 선교사들의 삶과도 닮아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랬다. 선교사들은 풍경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성탄절에 시작된 예배는 점점 많은 사람들을 모으며 든든한 교회로 성장해갔다.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에서는 어린 인재들을 키우고, 제중원에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렇게 선교사들이 머무는 ‘호랑가시나무언덕’은 십자가 복음과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빛고을 광주를 새로운 시대로 인도했다.

언덕의 나무들은 선교사들과 나란히 서서 복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1919년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선 삼일만세운동이 이 동산에서 시작되는 모습을, 1980년 신군부가 금남로를 시민들의 피로 물들일 때 교회가 함께 항거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오랜 친구였던 선교사들이 생을 다하고 언덕 꼭대기의 묘지에 묻힌 지금도 호랑가시나무들은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며, 오웬기념각 수피아홀 커티스메모리홀 같은 근대의 건축물들과 함께 양림동선교역사마을의 빛나는 보배로 사랑받고 있다.

▲ 양림동 호랑가시나무언덕에 세워진 우월손선교사 사택.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특히 우일손선교사사택 아래편에서 자라는 400년 수령의 호랑가시나무는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양림동을 탐방하는 순례자와 관광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어느덧 새로운 영감을 일으키며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 존재가 됐다. 호남신학대에서 수피아여고로 이어지는 일명 호랑가시나무길에는 선교사들의 사택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와 예술창작소가 문을 열고, 양림동만의 특별한 감흥과 치유를 선물한다.

▲ 호랑가시나무언덕창작소

몇 해 전에는 선교사들의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홀리스토리(Holly Story)’라는 이름의 마을기업이 탄생했고, 크리스천 시인인 다형 김현승의 후배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호랑가시나무, 언저리>라는 제목의 동인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양림교회 출신 한희원 작가의 갤러리에서는 호랑가시나무에 얽힌 이야기와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소속 교단은 달라도 서로 의좋게 지내는 세 양림교회는 선교사들의 유산이 보존된 양림동산 가꾸기에 힘쓰는 한편, 마을만들기 사업이나 성탄행사 등을 통해 양림동을 보살피던 선교사들의 후예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 선교사들의 사택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하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차량들이 수시로 왕래하며 기념물로 지정된 호랑가시나무 주변을 짓누르는 바람에 나무의 상태는 요즘 들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다. 오랜 친구를 이렇게 잃을 수 없다며 양림동사람들이 대책을 궁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부디 현명한 처방이 나오기를.

호랑가시나무길에는 오늘도 일찌감치 별무리 같은 작은 전구들이 따뜻하게 불을 밝힌다. 어둑하던 길이 다시 환해지며, 초록색 이파리에 싸여있던 붉은 열매들이 기지개를 켠다. 양림동에 또다시 성탄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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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떻게 사랑 받았나

성탄절을 축하하기 위해 나무를 장식하는 문화는 대략 16세기경 유럽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에서는 예전부터 동지나 신년 무렵에 푸른 나뭇가지를 창이나 천정에 장식하는 풍습이 존재했는데, 이 풍속이 기독교 신앙과 만나서는 성탄절을 축하하기 위해 나무에 색종이, 과자 등을 장식하는 이른바 ‘크리스마스트리’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로는 사철 푸른 상록수, 그 중에서도 전나무나 소나무 같은 침엽수들이 주로 사용됐다. 특히 우리나라 토종 수목인 구상나무가 유럽에서는 ‘한국전나무’라 불리며 크리스마스트리로 많은 인기를 누린다.

한겨울에 더욱 싱싱한 호랑가시나무의 붉은 열매와 푸른 잎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생명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곁들여지며 성탄 장식으로 즐겨 사용되고 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대중화되고 벌목 등으로 인한 환경파괴가 문제화되면서 커다란 나무대신 작은 나무화분이나 인공 트리들을 선호하는 추세이다. 특히 공기정화식물로도 인기를 끄는 율마나 아라우카리아, 향기 좋은 로즈마리 혹은 비단향나무 등이 애용되고 있다. 서양에서는 하얀 열매를 맺는 겨우살이가 성탄장식으로 인기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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