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패정권이 되어 지금부터 42년 전 지구상에서 사라진 자유월남을 기억한다. 주지하는대로 이 전쟁에 나선 미국은 전쟁에 지쳐 월맹과 비밀협상에 들어간 것이 1968년 5월 10일이다. 1968년 미국은 한 해 동안 495억 달러를, 1969년에는 508억을 퍼부으면서 자국군 53만 6000명을 월남전에 파병한 상태였다. 당시 베트남의 여야는 미국과 월맹의 비밀평화회담 앞에서 국론이 분열되고 있었다.

여당은 이대용 씨의 증언대로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면서 평화회담 참여를 거부했고, 야당은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여당을 압박한다. 고민에 빠진 자유월남정권은 여론에 밀려 회담장에 나가야 했고,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5년여 협상 끝에 종전에 합의 휴전을 했다. 이 휴전의 들어간 비용이 40억 달러였다. 이러한 가운데 자유월남은 평화에 눈이 멀면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당시 월남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중 10만 명은 유령군인들이었다. 저들은 장기 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을 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건 지도층 부패였다. 당시 대통령 티우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지만 이름만 군인이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고조되는 화해와 평화 분위기는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을 약화시켰고, 결국 이러한 모습이 식량부족 물자부족의 거지 군대에게 붕괴된 원인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정오 월맹공산군 제2군단은 독립궁을 점령하고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된다. 뜻있는 군부의 충직한 그룹인 월남군 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 사령관 반토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원비 준장, 제7사단장 웬반하이 준장은 망명을 거부. 권총으로 자살 패망하는 조국과 함께 옥쇄하였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가 맞은 비극이었다.

지금의 이 나라가 그 모습은 아닌지 묻고 싶다. 이제 거리로 뛰어나온 국민들은 자신들의 일터로 돌아가자. 국회에서 탄핵이나 아니면 국무총리를 인선 국정의 공백이 없도록 최소화하는데 힘을 모으자. 추락하는 국격이 더 이상 나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평화 속에서 정권이 이양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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