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열망으로 타오르던 기도의 불길

▲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한 매봉교회는 일제의 탄압 속에 세 번이나 예배당이 불타는 고난을 겪었다. 예배당과 함께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 생가도 일제는 함께 불태웠다. 현재 매봉교회와 유관순열사생가에서 그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고난받는 민족을 사랑한 신앙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유관순 열사 정신 복원한 생가와 매봉교회서 치열한 헌신과 섬김 되새기다

경부고속도로 목천나들목을 나오자마자 ‘독립기념관’의 입간판이 청연하다. 오른쪽 병천면 방향으로 길을 돌려서 꼭 10킬로미터를 달린다. ‘여러 개천을 아우르는 곳’을 의미하는 옛지명 아우내, 그 넉넉한 병천(竝川)의 평야를 바라보며 매봉산이 서있다. 160여 미터 높이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서 봉화를 올릴 만큼 우뚝하다.

▲ 유관순 열사 초상화.

소녀, 독립의 횃불을 들다

1919년 3월 31일 밤, 17살 소녀가 매봉산 정상에 올랐다.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매봉산 정상에서 기도를 마친 소녀는 봉화를 올렸다. 매봉산 북서쪽 아우내장터의 사람들이 그 봉화를 봤고, 산너머 남동쪽 용두리 매봉교회 성도들도 붉게 타오르는 불길을 확인했다. 그 밤 아우내 주민들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매봉교회 성도들은 봉화를 올린 소녀처럼 밤늦도록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소녀가 올린 봉화를 신호로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붉게 타오르던 봉화의 불길처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아우내 주민들과 매봉교회 성도들은 붉은 피를 흘렸다.

▲ 매봉산에 조성된 유관순열사추모각.

나라사랑을 품은 매봉산

병천 시내에 들어오자 매봉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매봉산은 그 전체가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17살 소녀 유관순 열사의 유적지(사적 제230호)였다. 태극기가 가득한 유관순 열사 기념공원과 동상을 지나 추모각에 올랐다. 무릎에 태극기를 움켜쥐고 흰 한복을 입은 유관순 열사 영정이 내려다보고 있다. 추모각 왼쪽 문으로 나서 매봉산 정상으로 향했다. 이끼가 낀 돌계단을 오르다보면, 유관순 열사의 후배인 이화여고 학생들이 세운 시비(詩碑)들이 발을 멈추게 했다.

“그대
꺽어짐으로 해서
우리는 이곳에 우뚝 섰다
아!
미치도록 그리운 조국의 독립으로
이 땅의 해맑은 웃음 이루려
씨 틔여 흩날리나니”
(이화여고 김희정)

▲ 시신조차 유실된 유관순 열사를 위해 마련한 초혼묘.

시를 음미하며 돌계단을 200미터 오르면 유관순열사초혼묘가 나온다. 유관순열사는 1919년 4월 1일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3월 1일, 유 열사는 감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했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결국 18살의 소녀는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모교 이화학당은 유 열사의 시신을 서울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했지만, 일제는 공동묘지에 군용시설을 지었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수습조차 안됐다. 이 초혼묘는 무덤조차 없는 유관순 열사의 영혼을 위한 곳이다.
초혼묘 오른쪽 돌계단으로 다시 200미터 오른다. 매봉산 정상, 바로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봉화를 올린 곳이다. 유관순열사봉화지에는 유관순열사봉화탑과 기념조형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봉화지에서 병천면 일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아우내장터 일대와 아우내만세운동기념비(충청남도 기념물 제28호)가 있는 동산, 저 멀리 독립기념관 본관의 푸른 지붕까지 보였다. 1919년 3월 31일 밤, 소녀 유관순이 기도하며 올렸던 봉화는 이 일대를 독립의 열망으로 타오르게 한 것이다.

▲ 매봉교회(박윤억 목사)와 유관순열사생가.

민족을 위해 세 번 불탄 매봉교회

정상 봉화터에서 되짚어 내려가지 않고, 남동쪽으로 산을 넘었다. 산길을 800미터 내려가면 초가지붕으로 복원한 유관순열사의 생가(사적 제230호)와 벽돌건물의 매봉교회에 닿는다.

유관순열사 생가와 매봉교회는 초가담장으로 맞대어 있다. 매봉교회의 공식 이름은 ‘유관순 기념 기독교대한감리회 매봉교회’이다. 이름처럼 매봉교회는 유관순열사가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이다. 현재 예배당은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교단사업으로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교회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하에 유관순열사전시관이 있다. 교회 옆 유관순 열사 생가도 1991년 옛 집터에 복원한 것이다.

현재 매봉교회와 유관순 열사의 생가에서 그 당시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현재 상태가 당시의 치열했던 삶과 상황과 역사를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매봉교회는 정확한 설립연도를 모른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자료에 1901년 박해숙 전도사가 사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1898년 스웨러 선교사가 이 지역에서 선교했다는 기록으로 교회의 역사를 유추할 뿐이다. 현재 매봉교회는 ‘1898년 설립한 천안 최초의 교회’라고 소개하고 있다. 공식 기록이 남아 있는 1901년 당시 매봉교회는 지명인 ‘지령리’를 따서 ‘대지령야소교당’이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국권회복을 위해 을사의병이 발발했을 때 소실됐다.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했다는 이유로 일본이 불태운 것이다. 첫 번째로 교회가 불탔다.

성도들은 다시 교회를 세우고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교육사업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이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때, 매봉교회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82명의 성도가 의연금을 대한매일신문에 보냈다. 일제는 또 매봉교회를 불태웠다.

▲ 유관순열사사적지 입구에 서 있는 유관순동상.

운명의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 독립만세 함성이 울렸다. 이 만세운동은 매봉교회 성도들이 주도한 것이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당시 매봉교회를 이끌었던 유중무 전도사(유 열사의 작은아버지), 조인원 속장(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등이 매봉교회 성도였다. 일제는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의 본거지인 매봉교회를 세 번째로 불태웠다.

매봉교회 박윤억 목사는 “매봉교회의 기록물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선교사의 기록이나 교적부마저 교회가 불타는 시련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예배당 지하에 마련된 유관순열사기념관에서 교회역사와 유 열사의 자료를 소개하며, 박 목사는 말했다. “당시 매봉교회 성도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학대받는 민족을 위해 독립을 외쳤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사회에서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사랑의 정신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헌신과 사랑과 섬김의 손을 펴면, 다시 사회는 교회를 믿고 따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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