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왕 목사(대구 성서중부교회)

▲ 정재왕 목사(대구 성서중부교회)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아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 12:25)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가 J. R. R. 톨킨은 작품을 통해서 중요한 성경적 메시지를 전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반지는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신비의 물체입니다. 대부분의 모험 영화들은 어떤 신비의 물체를 찾아내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묘사하는데, ‘반지의 제왕’은 오히려 신비의 물체인 반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부패한 인간이 절대 권력의 반지를 마음대로 사용하면 세상이 오히려 불행해질 것이니 권력을 경계하라는 교훈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도 인간이 절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는 절대 권력의 반지를 끼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어떻게 믿고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내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하나님에게 순순히 인생을 내맡기고 살아가는 한 사람, 다윗을 봅니다. 다윗이 남의 여자 밧세바와 불법으로 동침한 후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한 병에 걸리고 맙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다윗은 아기 살려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7일째 되는 날 애석하게도 죽고 맙니다. 다윗의 기도에 문제가 있거나, 믿음이 부족했다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16~17절에서, 비록 다윗이 죄를 범하긴 했지만 회개만큼은 철저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철야기도에 금식기도, 그것도 7일 동안 말입니다. 다윗의 기도에서 크게 문제 삼을 만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기를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다윗을 대신해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그래도 아기는 살려주셔야지요. 아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기의 뜻대로 행하시는 절대 주권자라고 하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범죄의 결과로 내려진 형벌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다윗은 자신의 죄를 솔직히 시인하는 것으로 이 힘든 과정을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며 죄를 솔직하게 시인했습니다. 이 고백은 아주 짧아서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시인했을 때 어떤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다윗은 솔직하게 죄를 시인했습니다. 자신의 죄에 따르는 모든 형벌과 고통을 감당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다윗이 범한 간음죄와 살인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처럼 자기 죄를 합리화시키거나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이뤄진다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매 맞을 때 엄마 품에 달려들어 맞는 것처럼 하나님 품에 안겨서 매 맞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도 새로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징계는 사생자나 버린 자식에게는 없고 오직 참 아들에게만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히려 징계를 통해서 자기를 살피고 더욱 굳게 세워지는 새로운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뒤 드린 참회기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내가 또다시 같은 죄 안 짓도록 나를 근본적으로 치료해 달라는 말입니다. 또 다윗은 이렇게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41:4)

죄를 용서받는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죄에 다시는 빠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수술을 받는 것입니다. 단순히 벌을 면제받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치료를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용서보다도 영성과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한 줄 깨닫고, 다시는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때려 쳐서라도 고쳐 주시고, 나를 다시 빚어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본문 19~20절에서 다윗이 취한 행동을 보면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절대 순복하면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아기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음에도 결국 아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다윗은 신복들의 염려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뜻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죽은 아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 뜻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나가야 할 일들을 위해서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회개하고는 지난날 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는 모습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새 아기를 주십니다. 다윗은 새 아기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평화, 화목’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 아기를 통해서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다시 화목해졌다는 것을 스스로 되새기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아기 이름을 ‘여디디아(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로 다시 지어주십니다.(25절) 이제 하나님도 다윗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회복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부터 다윗과 그의 아들과 가문을 통해서 큰일을 전개하시겠다는 예고와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며,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다윗과 그 가문을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것에 불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974년에 서울에서 ‘엑스폴로 74’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100만 기독교인이 여의도 광장에서 닷새 동안 집회로 모였습니다. 당시 중학생인 저도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때 기억에 남는 한 가지는 집회 기간 비가 엄청나게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과 전국의 교회가 비를 멈추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비는 더 많이 왔습니다. 그러나 폭우 중에도 집회는 계속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무섭게 내려친 폭우를 아랑곳하지 않고 집회장에 사람들은 모여 들었습니다. 더 간절히, 더 뜨겁게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름 때같이 집회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은혜를 다 받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증거하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멈추게도 하시지만, 비를 보내시면서 그의 은혜를 체험케 하십니다.

김정준 목사님의 기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여, 이전에는 은혜가 시련보다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간구했고 제게 있는 시련은 없어지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주여, 지금 생각하니 은혜만이 은혜가 아니라 시련도 은혜입니다. 은혜만이 아니라 시련도 간구할 것입니다. 은혜만 욕심낼 것이 아니라 시련도 원할 것입니다. 시련에서 받는 은혜처럼 고귀한 것이 없고 은혜로 받는 시련처럼 보배로운 것이 없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시는 은혜이고 주께서 주시는 시련이므로 어느 것을 더 사랑하고 원하겠습니까? 모두가 축복이오니 은혜와 시련에서 주님만 찬송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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