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자 예배당, 복음과 전통 조화하다
 든든한 구조의 원형 그대로 보존 … 나무기둥 결 하나에도 세심한 성경적 의미 담아

제101회 총회는 역사위원회에서 청원한 서울 승동교회와 김제 금산교회에 대한 한국교회역사사적지 지정을 받아들였다. 제98회 총회에서 염산교회를 한국교회순교사적지 제1호로 지정한 데 이어 우리 총회가 역사유산과 관련해 내딛은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행보이다. 이에 본지는 정식 지정식에 앞서 한국교회역사사적지를 미리 찾아가는 기획을 마련하고, 우리 교단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편집자 주>

▲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을 앞둔 김제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

김제시 금산면은 사시사철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동네이다. 방문자들 중에는 조금 특별한 풍경을 보고파 찾아온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ㄱ’자 모양의 오래된 한옥 건물이다. 높이 솟은 십자가 종탑 아래, 건물 입구에는 ‘금산교회’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김제 금산교회(이인수 목사)를 단체로 견학 온 이들은 평상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예배당에 들어가게 된다. 남자들은 대문 방향의 남쪽으로 난 출입문을 통해서, 여자들은 우물가 방향의 동쪽으로 난 출입문을 통해서 따로따로 입장하는 것이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천장을 가로지르는 서까래, 하얀 창호지를 바른 창문. 이제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옛 한옥예배당의 고즈넉한 풍경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예배당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낡은 강대상이 놓인 강단 귀퉁이를 가로지르는 휘장이다.

지금이야 남녀가 한 공간에서 예배하고, 말을 섞고, 공부나 회의를 함께 하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이 예배당이 건축되던 1908년 무렵의 풍습이나 문화는 그렇지가 못했다. 서양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며 개화기가 진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사회 기저에는 여전히 유교문화, 그 중에서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강력한 금기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ㄱ’자 예배당은 남녀를 차별 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당위와,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남녀구분의 관습을 수용해야 하는 초창기 선교사와 교회지도자들의 신중한 고민 속에서 찾아낸 타협점이자 해결책이었다.

남녀의 출입문을 각기 다르게 하는 일자형 혹은 ‘ㅁ’자 형태의 한옥예배당은 지금도 전국 곳곳에 산재해있지만, ‘ㄱ’자 모양의 예배당이 원형 그대로의 형태로 보존되어있는 사례는 김제 금산교회와 익산 두동교회 경우처럼 대단히 드물다. 김제 금산교회가 1997년 7월 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 낡은 강대상 뒤편에 ‘겸손의 문’이라 불리는 작은 쪽문이 보인다.

교회사가인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는 이 건물에 대해 자신의 저서에서 “우선 천장가구는 납도리 5량식과 3량식인데 지붕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나무도리(宗道里)와 가운데 중도리(中道里)를 올린 것이 탄탄한 건물을 더욱 튼튼하게 버티게 하였다. 여기에 휘어진 아름드리 소나무를 자연 그대로 다듬어 올린 대들보들도 튼튼하게 버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든든한 구조이기 때문에 중도리를 받치는 고주가 따로 없어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건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예배당 내부가 한국 전래의 제단구조를 취하면서 동시에 구약 성막의 ‘뜰, 성소, 지성소’로 이루어지는 3중 구조를 상징하고도 있다고 김 목사는 의미를 부여했다.

따라서 금산교회를 방문한 탐방객들은 건물 외관에서부터 예배당 안쪽 나무기둥의 결 하나까지 세세히 관찰할 일이다. 특히 남자석 천장에는 한자로, 여자석 천장에는 한글로 고린도전서 3장 16절부터 17절까지 성경구절을 새긴 상량문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1909년 4월 4일 당시 이자익 장로 집례로 열린 이 예배당의 헌당식에서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는 이 말씀에 기초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처럼 금산교회 성도들의 삶도 거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있다.

당초 예배당 안에 전시해두었던 금산교회 한옥예배당에 대한 설명과 교회 각종 역사자료, 옛 당회록과 풍금 등 유물들은 2015년 10월 10일 완공된 금산교회 문화유산전시관으로 옮겨졌다. 문화유산전시관에는 옛 교인들이 ‘ㄱ’자 교회당에서 예배하는 모습 등 과거 금산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상을 표현한 한지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김제 금산교회의 문화재 지정은 연이어 한옥예배당을 비롯한 개신교 유물들의 잇따른 문화재 지정, 특히 오늘날 문화재청의 기독교 관련 유물과 유품 등에 대한 근대문화유산 지정이 폭발적으로 이어지는 촉매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최근 10년 사이에 각 교단 총회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소속 교회의 유물들을 자체 문화재로 지정한 것과 비교해볼 때, 우리 총회가 이번 회기에 이르러서야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을 역사사적지로 지정한 것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

▲ ‘ㄱ’자 예배당에서 예배하는 옛 성도들의 모습을 한지공예로 제작한 작품.

금산교회 예배당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세 번째 문이 있다. 너무 작게 만들어놓은 데다, 가려져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강대상 뒤의 쪽문이다. 바로 예배 인도를 위해 설교자가 드나들던 문이다.

설교자가 이 문에 들어서려면 누구나 머리를 아래로 깊이 숙여야 했고, 키가 큰 서양선교사들의 경우는 허리까지 굽히지 않고서는 이 문을 출입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남녀성도들이 큰 불편 없이 드나들던 출입문에 비해, 설교자의 문은 왜 이렇게 작게 만들어 둔 것일까? ‘겸손의 문’이라고 불리는 쪽문의 별명에서 우리는 그 질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직분이 계급처럼 인식되고, 섬김 대신 군림이 지도자의 당연한 덕목처럼 여겨지는 왜곡된 문화가 교회공동체를 지배하는 시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참된 교회의 면모를 우리는 이 작은 쪽문을 통해서 되찾아야 하는 지도 모른다.

▲ 금산교회에서 보낸 30여년 세월이 감사와 은혜뿐이라고 말하는 이인수 목사.

이인수 목사는 김제 금산교회에 1986년 11월 전도사 신분의 담임교역자로 부임해 3년 만에 임지를 옮겼다가, 다시 5년이 지난 1994년 목사가 되어 다시 금산교회에 부임한 특이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도사 시절 현재의 예배당을 지을 때 당회장 임성재 목사님을 비롯한 김제노회원들이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어요. 1차에는 서울로, 2차에는 부산으로 여러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저희 건축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는 수고를 감당해주셨지요. 지금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새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 한옥예배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공사를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보존하자는 주장이 훨씬 더 강력해 ‘ㄱ’자 예배당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6·25 당시 마을이 불바다가 됐을 때 화재 위기를 겨우 넘긴데 이은 두 번째로 큰 위기였다. 그 예배당에서 이인수 목사는 30년 가까이 목회자로 살았고, 지금은 해설사 역할도 감당한다.

“주말이면 수십 수백 명씩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예배당 남녀석에 구분해서 앉게 하고는 금산교회와 ‘ㄱ’자 예배당에 얽힌 사연들을 들려주지요. 이자익 목사님과 조덕삼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에 주로 초점을 맞춥니다. 이 분들이 보여준 헌신과 배려를 본받을 수 있도록 말이죠.”

한옥예배당의 총회 역사사적지 지정을 앞둔데 이어, 개인적으로는 올해로 5회째를 맞은 이자익목회자상을 수상하는 등 특별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이인수 목사는 유서 깊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사랑 속에서 지내온 세월에 오로지 감사할 수밖에 없다며 “남은 임기 동안 마을을 복음화하는 일에 더욱 힘쓸 것”이라고 다짐한다.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 역사 이어가

미국남장로교 전주선교부 소속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김제 금산리의 지주 조덕삼이 1905년 자신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금산교회의 역사는 시작됐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세력과 증산도 등 신흥종교세력이 왕성했던 마을에 교회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았던 조덕삼의 역할이 컸다.

▲ 김제 금산교회를 대표하는 이자익에 대해 기록한 전기의 표지.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자 조덕삼은 모악산 중턱에 1908년 지금의 ‘ㄱ’자 예배당을 건립하는데 앞장서는 등 교회의 영수로서 헌신적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금산교회의 첫 장로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집 마부였던 이자익이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음에도, 이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오늘날까지도 겸손과 순종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 김제 금산교회를 대표하는 조덕삼에 대해 기록한 전기의 표지.

조덕삼의 후원 속에서 이자익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고, 금산교회로 돌아와 최대진에 이은 제2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후 나중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세 차례(제13회, 33회, 34회)나 총회장을 지내는 커다란 인물로 성장한다. 대전신학대학은 초대 교장이었던 이자익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을 교내에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한편 금산교회는 유광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삼일만세운동에 동참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교회폐쇄의 수모를 견디는 등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로서 면모를 이어왔다. 특히 조덕삼 장로의 가문에서는 아들 조영호, 손자 조세형까지 3대에 걸쳐 금산교회 장로로 섬기며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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