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으로 재무장, 개혁신학 보수에 앞장서다1. 들어가며총신대학교(이재서 총장)는 1901년 본교의 전신(前身)인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초대교장 마포삼열 박사)가 ‘개혁신학, 개혁신앙, 개혁실천’이라는 건학이념을 토대로 설립된 이후, 이를 다섯 교훈, 즉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로 구체화하여 목회자 및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주력해 오고 있다. 본 글은 제1회 졸업생으로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전백 송인서 길선주 이기풍 등을 배출한 이래로 현재까지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한국장로교 정초, 보수주의 신학 위에 놓다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로 출발한 총신이 개교 120주년을 맞았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이 문자대로 성취된 역사이다. 하나님 은총의 역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시대마다 쓰임 받았던 수많은 선진들의 헌신의 역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 신학교 정초기(1901~1938)평양신학교는 초대교장 마포삼열이 재직하던 1924년까지는 매코믹신학교 출신 교수들 일색이었는데, 1925년 라부열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프린스턴신학
시련으로 더 단단해진 개혁신학의 뿌리본 기사는 (총신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3) 그리고 (2021)에 수록된 박용규 명예교수의 ‘총신 120년의 역사, 신앙, 평가: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총신대학교까지 1901~2021’를 기초로 삼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하여 반대하는 승동(합동) 측과, 지지하는 연동(통합) 측이 끝내 접점을 찾지 못하며 한국 장로교회는 1959년 또 한 번의 분열을 맞았다. 결국 신학교의 분열도 피할
보수신학 회복과 입지 강화 노력 치열했다본 기사는 (총신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3) 그리고 (2021)에 수록된 박용규 명예교수의 ‘총신 120년의 역사, 신앙, 평가: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총신대학교까지 1901~2021’를 기초로 삼았음을 알려드립니다. 1939년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장로교총회는 평양신학교를 계속 유지하기 원했다. 사실상 문을 닫은 학교를 다시 운영하고자, 채필근 목사를 교장으로 한 새로운 신학교가 1940년 4월 공식
숭고한 ‘전문 목회자 양성’ 사명 힘껏 지켰다평양신학교를 모체로 태어나 대한민국의 대표 선지학교로 자라온 총신대학교(총장:이재서)가 개교 120주년을 맞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시절을 꿋꿋이 이겨왔고, 지금도 견뎌내면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총신의 역사와 그 요람에서 성장한 인물들의 면면을 되짚어보는 한편, 오늘의 성과와 과제들도 다시 생각하는 특집을 앞으로 8회에 걸쳐 마련합니다.먼저 세 차례 게재하는 ‘테마I-역사 편’은 (총신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3) 그리고
청산하지 못한 신사참배 역사 반드시 회개해야충청노회 임원회는 올해 ‘신사참배 회개’와 관련된 세미나를 계획했습니다. 추진과정에서 코로나19 확산 등 여러 사정이 생겨 세미나는 취소되었으나, 당초 세미나 강사 중 한 명으로 참여할 예정이었던 전북노회 증경노회장 윤희원 목사가 미리 준비했던 강의원고를 본지에 보내왔습니다. 충청노회 뿐 아니라 전국 노회가 함께 숙려할 주제라 여겨 본 지면에 내용 일부를 게재합니다. 전북노회의 신사참배 과오충남지역 장로교회는 미국남장로교 군산선교부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
‘은혜의 동산’서 생명 살리는 헌신의 삶 바치다이은상의 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여 한국인의 애창곡이 된 ‘동무생각’에는 청라언덕이라는 공간이 등장한다. 대구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들에게조차 생명과 우정의 터전으로 각인된 이 언덕을 어떤 이들은 ‘은혜의 동산’으로 기억하며 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장소를 신비롭고 소중한 땅으로 만들어 준 주인공들은 100여 년 전 이곳을 찾아온 서양인들이었다.동산의료선교복지회가 올해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발간한
소중한 한글가치 지키며 민족긍지 일깨우다한글날에 찾아가 올려다보는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은 평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전한다.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 역사와 후손들에게 얼마나 귀한 선물이었던가. 그 묵직한 감동과 상념을 고스란히 이어가기 위해 광장을 떠나 세종문화회관 뒤편 골목길로 몇 걸음 옮겨가보자. 국민은행 광화문사옥 바로 옆에 작은 공원이 나타난다. 오늘의 목적지인 ‘주시경마당’이다.구세군회관과 새문안교회 주변에 조성된 ‘한글가온길’에는 대표적 한글학자인 주시경의 집터와 한글회관 그리고 주시경마당이 이어진다. 국권을 빼앗긴 겨레
독립운동 최전선, 치료 힘쓰며 일제에 저항10월 한 달은 선물처럼 우리 겨레를 찾아와 진정한 ‘내 편’이 되어주었고, 헌신적인 섬김으로 뜨거운 감동을 안겨주었던 선교사들을 다시 생각하는 연속기획으로 꾸민다.최근 한꺼번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3인의 의료선교사들, 한글날에 다시 만나는 호머 헐버트 선교사, 창립 100주년을 맞은 동산의료선교복지회의 기념집 ‘한 알의 밀알 되어’에 등장하는 대구 청라언덕의 선교사들이 그 주인공이다. 국가보훈처(처장:황기철)는 2021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미국북장로교 소속
화촌교회와 송기명 장로금당교회와 같은 서천군 화양면에 소재한 화촌교회는 비슷한 연배에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기억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화양면과 이웃한 한산면 연봉리교회에서 1911년 완포리교회가 분립하고, 이 교회가 1934년 화촌리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화촌교회 역사가 이어져온 것이다.완포리 시절에 교회를 이끌어간 지도자는 김인전이었다. 훗날 목사가 되어 전주서문교회를 담임하며 전주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현재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의정원장을 지내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친 바로 그 인물이다.
금당교회와 조남영 장로금당교회는 1907년 5월 7일 유성열 영수의 인도를 받은 장년 18명, 유년 15명의 성도들이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의 초가 7칸을 매입해 회집하며 설립됐다. 올해로 114년의 역사를 이어온 공동체이다.수많은 사건들과 인물들이 금당교회의 역사를 장식했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깊이 새겨진 인물은 조남명 장로이다. 부친인 조찬구가 인근 군산으로 왕래하다, 노방전도를 하던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회심한 것이 믿음의 가문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아버지의 권유로 신앙세계에 입문한 조남명은 군산의
자발적 섬김, 강력한 공동체 만들다석촌교회서천 북향골에 살던 이치행 씨는 어느 날 몹시 아끼며 기르던 소를 잃었다. 이씨는 외양간을 고치는 대신 서양 선교사를 찾아갔다. 이웃 사람으로부터 가까운 화산교회(현재의 기산교회)에 선교사가 와서 부흥회를 인도 중이며, 그에게 부탁하면 혹시 소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이후 이치행 씨가 과연 잃어버린 소를 되찾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더 좋은 보배를 찾은 것은 분명하다. 부흥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은 이 씨는 이후 자신의 집 사랑채를 예배처소로 내놓
기산교회 예배당 현관에 들어서면 넓은 벽면 한쪽을 교우들의 사진 하나하나로 가득 채운 광경을 발견한다. ‘기산교회 구역별 교인현황’이라는 간판 아래, 담임목사를 비롯한 남녀노소의 성도들 면면이 구역별로 소개되는 것이다.쉽게 넘길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나삼주 장로는 “나이나 직분 등을 불문하고 모두가 공동체의 소중한 일원이며, 동역하는 청지기들임을 보여주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한다.실제로 기산교회는 몇몇 주역들만이 이끌어가는 공동체가 아니다. 담임목사가 아이디어를 내면, 재력을 가진 성도들이 예산을 뒷받침하고, 시간과 일손 동원이
서천 최초 장로교회, 헌신의 역사 기록하다박중무 장로 기적적 치유 계기로 1902년 설립 … 지역섬김 진력, 부흥 시대 이끌어둘째아들도 아프기 시작했다. 역시 백약이 무효였다. 금쪽같은 자식이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는데, 아버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똑같은 증세를 보이던 맏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게 불과 한 해 전의 일이었다. 이렇게 아들 형제 둘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일까.1899년 충남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 수출부락에 살고 있던 박난수씨에게는 답답한 가슴만 두드리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이웃
1세기 넘게 마을 지킨 섬김 공동체■옥곡교회충남 서남부는 선교 초창기 다양한 교파들이 유입되어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감리교는 예양협정에 따라 충청권 전역을 관할하고 있었고, 침례교는 한국에서 최초의 교회를 이 지역에 세웠다. 장로교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가까운 전북 군산의 장로교 선교부가 그 중심에 있었다.총회에 소속된 충남지역 교회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부여 옥곡교회(현성귀 목사)는 이런 배경 속에서 설립됐다.군산 궁멀에 선교센터를 세운 미국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배편을 이용해 서해안 일대를 오르내리며 복음을 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