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주님 앞에 충성스러운 신앙공동체였다3·1만세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앞장서다 고난의 시간들을 감내한국교회 거목들 배출하고 제85회 총회 유치하며 복음행진 이어가 누구도 빠지지 않았다.넉넉한 성도들은 건축 자재를 기부하거나 헌물을 했다. 살림 여유가 많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헌금했다. 그마저도 어려운 이들에게는 ‘날 연보’라는 방법이 있었다. 건축 현장에서 일품을 바치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또한 큰 헌신이었다.선교 초창기부터 예배당을 짓는 것은 한국인 성도들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
일제와 공산정권 박해 견뎌낸 ‘순수 신앙’ …영광의 시대 맞다교육과 선교 앞장서 통일의 꿈 실현하는 공동체로 도약 중평서노회(노회장:방병진 목사)의 뿌리인 평안도 지역은 한국장로교회의 황금어장이었다. 선교 초창기부터 어느 지역보다 복음이 활발히 전파되며,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첫 조직될 무렵에는 전국 7개 노회 중에서 2개 노회가 평안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특히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던 평양을 중심으로 삼은 남평안노회(훗날 평남노회로 개칭)의 교세는 다른 노회의 2~3배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이 때문에 평
진리가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으로 백년 세월 이어와전남동부권 교회들을 관할하는 순천노회(노회장:박선홍 목사)가 역사적인 100주년을 맞았다. 특히 3년여에 걸친 분쟁에 극적으로 마침표를 찍고, 화합하는 분위기 속에서 맞이한 100주년이라 그 의미가 더욱 깊다.순천노회의 탄생 배경에는 미국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과, 1913년 개설된 순천선교부의 눈부신 활동들이 자리하고 있다.1900년대 초 전남지역 선교가 본격화할 무렵 순천지역은 광주선교부의 클레멘트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오
비누아트의 땅끝과 한국의 땅끝 시공간 초월한 선교영성제임스 노블 맥켄지(한국명 매견시·1865-1956)가 울릉도를 방문하기 한 해 전인 1909년, 울릉도에는 이미 여러 교회들이 설립되어 있었다.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삼척 출신 감리교인 김병두 씨가 울릉도에 정착하면서 가장 먼저 울릉도교회가 세워졌다. 또한 그의 선교를 통해 나리교회(현 천부제일교회), 장흥교회(현 간령교회), 저동교회(현 동광교회), 도동교회(현 도동제일교회)가 연이어 세워지며 1909년 한 해에만 4개의 교회가 들어서게 된다. 이 교회들을 든든히 세우
다도해 중심지를 제자도 산실로 만들어 간 호주 선교사들경남지역은 호주장로교회선교부 관할 지역이었다. 호주장로교회의 첫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에 들어온 지 6개월 만에 병으로 별세했다. 그 후임 제임스 메카이 선교사도 2년 만에 병으로 한국을 떠났다. 호주선교부는 새로운 선교사를 물색했다.중국에서 선교하다 병고로 영국에서 휴양 중이던 앤드류 아담슨(한국명 손안로)은 조선의 첫 선발대 선교사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한국선교에 응답한다. 아담슨은 릴레이(이어달리기) 선교사였던 셈이다.수탈의 뱃길이 생명의 뱃길로아담슨이
목소리 바치고 생명 바쳐 섬마을에 복음 외친 천국 메신저예수를 믿기 전 이기풍 목사는 1891년부터 1893년까지 평양에서 포졸 일을 했다. 이때 만난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를 핍박하기도 했으나, 이후 회심한 그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인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되었다.당시 조선독노회의 결정에 따라 이기풍 목사는 1908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받는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에서 목포 양동교회로 이동해 한 달 정도 머물다, 1908년 2월 배를 타고 목포항에서 추자도를
조선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격의 없이 친구가 되어준 ‘오목사’조약도에 들어갔다. 117년 된 교회가 눈앞에 들어왔다. 약산제일교회이다. 완도 조약도의 옛 이름은 약산도이다. 조약도의 산에서 나오는 129종의 풀들이 약초가 된다하여 약산도(藥山島)라 불렀고, 그 풀을 먹고 자란 흑염소가 보약이 된다고 하여 약산 흑염소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완도 약산제일교회(옛 관산리교회)는 1904년 오웬 선교사(Clement Carrington Owen· 1867~1952)의 전도인 노학구에 의해 복음이 처음 전파되고, 1905년 오웬이 직
남쪽 섬 진도, 믿음의 사람들 세우며 끝까지 한국 사랑한 선교사조선으로 온 언더우드 목사는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으로 돌아간다. 귀국 후 언더우드는 맥코믹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조선선교에 대한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를 계기로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7인이 헌신하여 조선으로 온다.‘7인의 선발대’로 불리는 이들 중 한 사람인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목사와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서 선생과 동행하여 자신의 선교지역을 답사한다. 1894년 3월 7일부터 5월까지 2개
복음의 항해로 수많은 섬들에 풍요로운 영적 생태계 이루다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스테이션을 만들고, 그 선교스테이션을 중심으로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선교스테이션은 요즘 말로 하면 선교플랫폼이다. 교회, 학교, 달성경학교, 병원은 선교스테이션의 가장 기본적인 선교 생태계를 형성했다.하지만 선교플랫폼을 움직이는 동력은 스테이션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땅 끝을 찾아가는 순회선교로 확대됐다. 그리고 그 순회선교를 통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선교스테이션으로 보내어 양육을 통해 제자로 만들고, 다시 땅 끝으로 보냈다. 선교스테이션과 땅
서해안 고군산군도 순회하며 새 생명 전한 최초의 복음선 선교사한 장의 사진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조선말 황포돛배 위에 서 있는 외국인 선교사의 사진이었다. 그는 왜 배 위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황토 돛배는 무엇인가? 나는 궁금증을 갖고 이 사진의 주인공을 추적했다. 그 주인공은 선교사 전킨과 드류였다. 그리고 이 배는 서해안과 만경강, 동진강 일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입한 복음선이었다.황포돛배에 복음을 싣고윌리엄 M.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한국명 전위렴) 선교사는 조선에 온 미국 남장로교회 7인
복음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 선교사들, 마침내 땅 끝에총신 졸업 후 20여 년 동안 낙도선교회를 섬기며, 사람이 살고 있는 국내 436개 섬을 복음화하고 낙도와 오지의 교회들을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헌신해왔다. 한편으로는 미얀마 선교사들을 도와 음악대학을 운영하며 빈민선교에도 힘쓰는 중이다. 저서로는 등이 있으며, 섬선교 역사를 다루는 신작도 준비하고 있다.낙도사역을 하다 설립한 지 120년 이상 된 섬 교회를 만난 일이 있다. 궁금증이 생겨 알아보니 한국선교 초창기
복음 품고 조국 품으며 자신의 인생을 던진 양림동산의 선구자들‘선교역사마을’ ‘펭귄마을’ ‘호랑가시나무언덕’ ‘만세운동길’ 등 깊은 역사가 배이고 다채로운 문화들이 공존하는 곳이 광주 양림동이다.기독교복음과 함께 서구문물이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유입되면서 여러 문명과 사상이 때로 충돌하다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이런저런 사건도 많았고, 더불어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동네이기도 하다.양림동 일대 기독교 문화유산들을 탐방객들에게 안내하는 투어를 비롯해 갖가지 선교·문화사역을 전개하고 있는 양림선교동산이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거
사회계몽 앞장서고 신앙 정체성 100년 지켜낸 공동체충북은 역사적으로 우리 교단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 아니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예양협정 당시 감리교 담당지역이었던 충남과는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에 여러 교단들이 이 지역에 진입하여 활동하면서 할거한 영향이 크다. 게다가 1960년 교단 분열 당시 충북노회 소속 교회들 대부분이 예장통합 쪽을 선택하면서 더욱 저변이 약화됐다.그래서 100년 역사를 지닌 부강장로교회(조용준 목사)의 존재는 몹시 귀하다. 2010년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며 행정구역상 변화는 생겼지만,
선배들의 정신 계승하며 영광의 역사 이어와독특한 첫 인상이다. 온갖 예배당을 만나보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다. 정면의 외형은 분명히 70년대 분위기인데, 전체적으로는 21세기 느낌이 있다. 시대가 혼재되어 조화를 이룬 이 풍경 앞에 서면 무언가 압도되는 힘이 느껴진다. 차곡차곡 쌓인 세월이 자아내는 무게이다.경산 자인교회(권희찬 목사)는 124년의 시간 중 어느 하나도 허투루 보내지 않은 공동체이다. 1972년 당시 온 교우들이 손수 지은 교회당의 외관을 이후 50년 동안 수차례 증축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살려놓은 모습만 보아도
정금 같이 순전한 신앙전통은 우리의 자부심 대창리에서는 어느 집 문을 두드려도 기독교인을 만날 수 있다. 너무 과장한 게 아니냐고 되물을 만도 하다. 하지만 마을주민 98%가 대창교회 교인이라 하니 결코 없는 얘기가 아니다.김제시 죽산면의 대창교회(김영복 목사) 사방이 예수마을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의 일이다. 미국남장로교 군산선교부 소속 전킨 선교사가 1897년 김제 송지동교회에 이어 1900년 입석리교회(월성리교회)를 세웠고, 대창리의 이순명 이기선 최학성 최학삼 최태삼 최윤중 등 5명이 입석리교회에 출석하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