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이 바로 그 시간이며, 우리는 그 중심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고유영역이라 여겨졌던 분야를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물결은 거세고 속도는 매우 빠르다. 시대의 변화 앞에 많은 이들이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것이 답이다’ 자신하지 못한다. 교회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유튜브의 약진은 변화하는 시대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유튜브 운영자들의 수준이 예전 같지 않다. 관계의 깊이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기술의 진보를 등에 업고, 교회와는 또 다른 소속감을 만들며 소통을 이
필자는 동이 터 오르는 아름다운 아침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실 새로운 은혜를 기대한다. 그 기대를 품고 기도하며, 창세기 1장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 특히 1장 3~5절 말씀을 좋아한다.“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영어성경에서는 ‘light’로 번역하는 이 빛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기록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대구읍성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도, 대구는 여전히 읍성 내부를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구도심(old town)과 신도심(new town) 사이의 지역적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곳이 바로 대구이다.물론 계속되는 개발로 근대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다른 도시들에 비해 100년 전의 모습, 특히 대구 선교가 시작되었던 시대의 모습을 비교적 많이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큰 도로 주변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겨운 골목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품은 채로 사람들
미국 이민 생활 초기에 너무 힘들 때면 밤하늘을 보았다. 별을 바라보고 어머니를 부르며 뒷마당에서 혼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월남전이 한참일 때는 미 육군으로 징집되어 서독에서 근무했는데, 영어로 인해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된 일이 수도 없다.어느 날 중대장이 나에게 “집에 가고 싶으냐?(Do you want to go home?)”라고 묻기에 클럽에 갈 때마다 불렀던 노래 이 생각나서 “yes!”라고 했다. 그런데 친구가 그 말은 휴가를 보내주겠다는 게 아니라 ‘제대하겠느냐?’는
동성로는 대구읍성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 난 길이다. 앞서 오목조목 대구골목 11번째 이야기에서도 말했듯이 친일파 대구군수 박중양에 의해서 대구읍성이 허물어지고 난 뒤 바로 그 자리에 신작로가 만들어졌고, 대구읍성의 동쪽 성벽에 해당하는 길을 동성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동성로는 대구 제일의 중심가이자 수많은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며, 대구의 청춘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젊음의 거리이기도 하다.동성로를 걷다보면 그 자체로 거리의 박물관을 체험할 수 있다. 대구시는 대구읍성의 돌을 모아서 동성로 곳곳에 깔았다. 그래서 이 거
나이아가라폭포를 볼 때마다 그동안 저렇게 많은 물이 계속 흘러갔는데, 아직도 물이 고갈되지 않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언젠가 옆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내 생각을 말했더니, 자기도 동감한다고 대답해서 우리 둘은 금방 친해졌다. 알고 보니 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미국 한 신학교의 유명한 전도학 교수였다.이 교수에게 먼저 가족을 소개한 후 “나는 이 폭포의 주인입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는 “이 폭포는 미국 소유인데 어떻게 한국인이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라면서 웃었다. 그래서 “이 폭포를 누가 만드셨습니까?”라고 반문하자 ‘그야 하나
오목조목 대구골목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두사충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지관으로 참전했던 사람이 바로 두사충이다. 이순신 장군과도 막역한 사이였던 두사충은 충무공이 한산도에 주둔할 때 함께 지내며 친분을 쌓았다.노량해전에도 함께 참전을 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묏자리를 잡아주었다고도 전해진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는 명나라로 돌아갔었지만, 정유재란이 끝났을 때에는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그런데 두사충은 왜 조선에 귀화했을까? 명나라의 미래를 예견했기
한 나라의 인사를 보면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의 인사는 ‘샬롬’이다. 우리말 ‘평화’로 번역할 수 있지만, 실은 더 넓고 깊은 의미가 있다. 육신과 정신과 영혼, 그리고 환경과 조건 모두가 온전한 상태를 가리켜 ‘샬롬’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들에게 생존을 위협받으며 살아온 유대인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인사라고 할 수 있다.고대 그리스인의 인사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였다. ‘은혜’(카리스)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값없는 선물을 가리킨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신에게서 온다고 믿고, 신을 믿지
대구 약전골목(약령시)은 육체를 치료하는 길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대구에는 경상감영이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삼남에서 가장 큰 시장인 서문시장이 생기면서 대구는 사람들과 물자가 함께 모이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대구 약령시의 기원은 대략 1630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니, 거의 4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다. 처음에는 매일 모이는 상설시장이 아니었다. 경상감영 주변에서 음력 2월 1일부터 모이는 춘령시(春令市)와, 음력 10월 1일부터 모이는 추령시(秋令市)로 약령시가 시작된 것이다.대구 주변 고령, 칠곡, 의성, 군위,
상 위에 책을 놓으면 책상이 되고, 밥을 놓으면 밥상이 되고, 술을 놓으면 술상이 된다. 그렇듯 한 사람의 인생도 무엇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가 살아온 모습이 각각 다르게 짐작된다.시편의 시작은 의인과 악인의 모습을 각자 어느 길(데레크)로 가느냐에 따라 달리 표현한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타락)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명나무의 길은 갈 수 없도록 불 칼로 지키시면서 차단하셨다.(창 3:24) 그래서 아담의 족보(창 5장)를 보면 그의 후손들이 에녹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고 기록된다.구약에서 길(데레크)은 사람의
요즈음은 신발을 사는 일이 어렵지 않다. 대형마트나 신발매장에 가서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기성품 구두와 운동화를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선택하면 그만이다. 심지어는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해외의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오른발과 왼발 양쪽이 똑같은 사람은 거의 없고, 발 모양도 사람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사기 위해서 많은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경우들도 있다. ‘발은 제2의 심장’이라고 하는 만큼 편한 신발을 찾는 일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옷을 맞추듯
‘나를 행복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와 ‘불행하게 하는 요인이 사라지면 나는 행복해질까?’라는 질문을 생각하다가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은 행복합니까?” 그랬더니 “예,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내게 “당신도 행복합니까?”라고 되묻는다. 나 역시 “예, 행복합니다. 왜냐면 행복한 당신과 함께 있으니까”라면서 함께 웃었다.내가 은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가 “지난 25년간의 목회가 행복했느냐?”고 하면서 “힘든 것은 없었느냐?”라고 묻기에 “목회는 행복했지만, 나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과 남을 용서하는 것은 참 힘들었다”라
‘진골목’은 말 그대로 좁은 골목이다. 진골목에 들어서면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칠 것만 같다. 넓은 대로(大路)들이 도시를 거미줄처럼 뒤덮고 있는 나라에서, 그리고 그 길을 자동차로 씽씽 달리는 것에 익숙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렇게 좁은 골목이 생소하기도 할만하다. 하지만 골목은 원래 이런 곳임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진골목이다.진골목의 원래 뜻은 ‘긴 골목’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길다’를 종종 ‘질~다’라고 발음한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진골목은 그리 길지 않다. 한 100~200미터 남짓 될 뿐이다. 그런
6월은 평생 목사의 사모로 사셨던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큰형님의 곁으로 가신 슬픈 날이 있어 슬픔과 그리움으로 시작한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셨던 많은 이야기 중에서 6·25전쟁과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과 관련한 목격담을 지면을 빌어 소개하려고 한다.순천동부교회 1대 목사이신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이 순천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손양원 목사님이 계신 신풍 애양원으로 피난 가셨다. 얼마 후 아버지는 다른 목사님들과 함께 부산으로 가시고, 어머니는 세 아들과 함께 신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상황이 나빠지자 어머니는 모 장로님
대구는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현제명과 박태준 등이 바로 자랑스러운 대구 출신 기독교인들이다. 대구에는 이미 1900년대 초에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07년 신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고, 1916년 박태준의 지휘로 남성교회에서 대구 최초로 찬송가 합창공연이 열렸다. 이듬해인 1917년에는 박태준, 현제명 등이 참여하는 제일교회 찬양대가 조직되었다.그런데 대구에는 음악과 관련된 또 다른 족적이 있다. 그 주인공은 대구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사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