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모르게 교회의 재정을 낭비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는 회계연도가 끝나는 연말이 되면 부서마다 회식이 줄을 잇는다. 그동안 회식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해 예산을 남김없이 다 쓰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나 교회 재정은 그렇게 써서는 안 된다. 교인들이 쓸 것 안 쓰고, 먹을 것 안 먹고 모아 드린 헌금을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된다.교회 재정을 아끼는 데는 무엇보다 담임목사의 태도가 중요하다. 담임목사가 교회 재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교인들에게
요즘 우리 사회에는 ‘성형공화국’이란 신조어가 유행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성형수술에 목을 매고, 하도 성형수술이 유행이다 보니 외국인들까지 성형수술을 하러 여행을 온다는 이야기였다.외양 가꾸기에 몰두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언젠가는 꺼져갈 인간의 육체를 가꾸는 데 갖은 정성을 기울인다. 마치 육체가 최고의 섬김 대상인 것처럼 대한다. 육체가 우상이 된 듯하다. 인간은 늙으면 백발이 생기고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사람들은 자꾸 이 기본적인 상식을
나에게는 교인들이 지어준 ‘울보 목사’라는 별명 말고도 몇 가지 별명이 더 있다. 하루는 한 기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우리 교회가 펼치는 ‘불신 장애인 사랑 나누기’를 밀착 취재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별로 취재할 것이 없을 거라고 했는데도, 꼭 취재를 하고 싶다고 거듭 요청을 해 왔다. 그래서 약속을 잡고 아침 일찍 생필품들을 구입하여, 함께 물건을 들고 옥수동과 금호동의 가난한 이웃들을 찾아다녔다.같이 다니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기자는 교회에서 많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 명일동의 한 대형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교회
1998년 수원에 있는 한 교회의 청빙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독일에서 만 5년을 살았다. 독일 생활은 나의 가족에게 견문을 넓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들딸에게도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리 부부와 달리 지불해야 할 대가들이 많았다. 첫 번째가 공부였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딸은 2학년이었다. 유년기를 독일에서 보내고, 초등학교도 독일학교를 다녔던 터라 아이들은 한국말이 서툴렀다. 자연히 학교 성적도 최하위권이었다.하루는 학교를 다녀온 아들이 저녁밥을 먹다 말고 시무
대학을 다니면서 막연하지만 유학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 유학의 꿈은 옥인교회 부목사 시절 이루어졌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이 주일 오후 헌신예배에 설교를 하러 오셨는데, 고등학교 시절 나를 가르치던 전도사님이셨다. 자신처럼 목사가 된 나를 보고 놀라던 그 분은 잘됐다는 듯 독일 이야기를 꺼냈다. “호 목사! 독일에서 목회해 보지 않을래?” 독일에서 한국인과 독일인 교회를 담임하던 그분은 당시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기도해 보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이미 결정한 상태였다. 독일 이민 목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3
언젠가부터 나는 배우자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가난하게 자라온 이유도 있었지만, 평생 목회자로 살 텐데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까 하는 걱정이 더 큰 이유였다. 당시 신학대학원생 중에는 결혼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가난했다. 점심을 못 먹는 것은 물론이고, 등록금을 못 내 휴학을 해야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런 모습을 자주 보면서 직업을 가진 배우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하나님은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신 것 같다. 1986년 12월, 대학 후배가 자기 교회 선배 언니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뜨거운 소명을 갖고 신학대학을 간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요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교회 사역을 하면서 그런 확신이 더 커졌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목회자로 사는 것이 내 인생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이 확신은 하나님께서 나의 형편을 아시고 하나하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보면서 더 커졌다.하나님은 전도사 시절 나를 문서 선교사로 각별하게 사용하셨다. 그때 나는 신학대학원을 야간반으로 다녔다. 당시 신학대학원 등록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대학 진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 해를 쉬면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연좌제로 인해 떨어지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하루는 같은 교회 장로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용한아! 너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 할 말이 없었다. 사관학교 불합격은 나에게 깊고 어두운 구덩이와 같았다. 그 때 나는 그 구덩이에 빠진 채 헤어날 생각도 못하고 두 손만 늘어뜨리고 있었다.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장로님은 다정하게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여셨다. “너는 신학대학에 가야 할 사람인 것
우리 교회가 구제하는 교회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9년 동안 꾸준히 사역을 해 왔기 때문이다. 한두 해 반짝하고 말았다면 지금 같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지금껏 구제를 꾸준히 해 올 수 있었던 힘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었다. 예수께서 길을 보여 주셨고, 성령께서 이끄셨기 때문이다.우리는 빌립보서 1장 6절을 통해 좋은 일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 비결이란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인들은 나를 ‘울보 목사’라 부른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설교를 하다가도, 기도를 하다가도, 심방을 하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린다고 붙여준 내 별명이다.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40여 년 가까이 사역하는 동안 목회가 힘들거나 성도들이 속을 썩여서 눈물을 흘려본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유독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거나 그들의 사연을 듣고 말할 때면 눈물이 흐른다. 그 뿐 아니다. 가난한 이들이 이유 없이 무시를 당하거나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볼 때도 눈물이 흐른다.사람들이 많이 실수하는
구제는 교인 모두를 일깨우는 일이기도 했다. 옥수동과 금호동이 재개발된 지 5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교회 교우들 중 절반은 원주민이고, 남은 절반은 이주해 온 아파트 주민들이다.사통팔달 교통망에다 강남이 지척인지라 옥수동과 금호동 아파트 값은 강북 최고 수준에 가깝다. 그렇다보니 자연히 새로 이주해 온 아파트 주민들은 과거 달동네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젊은세대일수록 더 그렇다. 그런 교인들이 자의반 타의반, 교회의 구제 사역에 참여하면서 여러모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특별히 우리 교회가 매월 시행하는 ‘5만원 사랑 나누기’ 즉,
얼마 전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옥인교회 권사님 한 분을 만났다. 부목사 시절 내가 담당한 교구에 속했던 분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다가 권사님은 20여 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청와대에서 일하던 남편이 갑작스레 일을 그만두며 형편이 어려워졌는데, 당시 권사님 댁에 심방 차 방문한 내가 10만원을 몰래 쥐어주고 갔다는 이야기였다.나는 드린 기억도 없다고 했더니 권사님은 내 손을 잡고 ‘평생 잊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누군가 건넨 위로는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다.2009년 성탄절 전날, 교회로 전화가 한통
우리 교회 옆에 ‘옥수마을마당’이라는 쌈지공원이 있다. 정자 하나와 벤치 몇 개, 운동기구 서너 개가 단출하게 자리 잡은 작은 공원이다.몇 년 전 동네 주민들이 그 공원 곳곳에 꽃나무 묘목과 모종을 심었다. 쓰레기를 줍고 땅을 파고 1000여 개가 넘는 모종을 옮겨 심느라 주민들은 제법 땀을 흘렸다. 그날 이후 공원은 동네 주민들이 즐겨찾는 사랑방이자 정원이 되었다. 봄이면 철쭉이, 여름이면 비비추가 공원을 물들였고, 사람들은 꽃을 보며 저마다 마음이 푸근해졌다.세상이 부유해지면서 꽃은 가난해졌다. 어릴 적 집 앞이며 동네 곳곳에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대로 작은 이들과 함께 있어줘야 하고, 약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줘야 한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작은 이웃들을 한 사람씩 맡아 돌본다면 이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문제 청소년을 한 사람씩 맡아서 기도해주고 상담해주고 사랑의 필요를 채워준다면 이 세상은 놀랍도록 변할 것이다.우리 교회 바로 옆에는 박일분(가명)씨가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옥수동에서 30년을 살다가 보증금 7100만원을 내고 3년 전에 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나마 보증금 2100만원이 부족해 은행 대출을 받아야 했다.박씨는 하반
19세기 위대한 설교가였던 무디는 가슴이 답답하고 삶의 무력감을 느낄 때 직접 노방전도를 했다고 한다. 한꺼번에 수천 명을 감화시켰던 그였지만, 한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고 부딪치면서 새 힘을 얻었던 것이다.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목회활동 외에 대외적인 활동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어 일주일동안 목양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하루 종일 목양실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교회 일을 살피다보니 종종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지곤 했다.매년 1억원 넘게 이웃을 구제하고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라고 하지만,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