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구원자, 그리스도 부활을 선포합시다“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6)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우리는 성경을 변호하기보다 더 많이 선포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케리그마는 본래 ‘전파하다’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로 신약성경에 약 61회 사용됐습니다. 케리그마는 이미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지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고, 계시는 ‘사람의 인생’ 속에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을까요?소설가이자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진 C.S. 루이스는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신념을 바꾼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저서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 33:8~9)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는 수많은 예언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시대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입니다.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예언이 사실일까요? 그 예언은 모두 성취됐을까요? 그리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미래에 확실히 성취될까요?‘성취’란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됐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 자신과 관련
아빠 아버지께 순복의 기도를 올립시다“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신학을 ‘인식론적 신학’과 ‘하나님의 주권적 신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우선으로 합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이해가 쉽고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오성을 초월하는 문제가 생기면 해석이 어려워집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나?’ 등의 문제를 이성과 경험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는
헌신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 14:3)오늘 본문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1~2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꾀합니다. 3~9절에 등장하는 한 여인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에게 붓습니다. 10~11절에는 제자 가룟 유다가 나오는데 예수님을 팔려고 거래하면서 배신을 합니다. 마가는 샌드위치 구조를 좋아하는데 한 여인의 헌신을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변증’은 헬라어 ‘아폴로기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방어’ 혹은 ‘변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안셀무스는 에서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변증했습니다.“①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②가장 위대하다는 것은 어떠한 부족함도 있을 수 없다. ③만일 어떤 것이 사람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면, 이는 존재가 부족함을 가진 것이다. ④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의 정신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안셀무스는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신32:4) 여러분, 왜 우리는 정의를 추구하고, 정의로운 행동을 좋아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불의에 항거하고, 저항하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도덕적 존재’로 창조됐기 때문입니다.사람에게 도덕은 태생적입니다. 만약 사회현상으로서 도덕이 생겨난 것이라면, 그 도덕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악의 개념’이라든가 ‘정의의 개념’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기쁨을 누리시나요?“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놀라운 세계관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긴 것들을 모두 분토처럼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머리로서
신앙의 경주에서 끝까지 승리하십시오“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올림픽을 통해 비록 내가 경기자는 아니지만 금메달의 영광이 어떤 건가를 봅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마치 내가 금메달을 딴 것같이 기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말 많고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익숙했던 경기자의 모습을 하나의 경주하는 것에 비유해 교훈합니다. 당시 고린도는 올림픽이 열렸던 아테네와 인접해 있었고 올림픽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시 86:8) 세상에는 신이 참 많습니다. 해, 달, 별을 신으로 믿는 사람도 있고, 식물이나 동물을 신으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연 안에 깃들어 있는 영적 기운을 신으로 믿는 사람도 있고, 상상 속의 존재를 신으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꿈속에 나타난 알 수 없는 존재를 신으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학자들은 이러한 여러 학설들을 정리하고 분류해 세 가지 ‘신의 존재 양식’을 말합니다. 이는 이신론, 범신론, 유신론입니다.이신론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무신론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고 칭송받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사고와 감정과 행동 이외에, 실체로서의 정신 혹은 영혼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정신의 연속성은 습관과 기억의 연속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신이나 영혼이 기억이라는 뇌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유발 하라리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 과학은 이렇게 주장한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인간은 분리할 수 없
우리에겐 능치못한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다“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사람을 볼 때 그가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는 ‘어떤 사람인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더 나아가 블레셋과 사울의 싸움에서 성경이 집중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에서 긴 부분을 할애해 싸움의 과정과 결과보다는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이 각각 어떤 영적인 배경을 가지고 싸움을 하는 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싸움은 힘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어느 목사님이든지,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면 꼭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왜 목사님들은 성경으로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그 이유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란 ‘감춰진 것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물론 하나님은 성경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다. 자연을 통해, 환상이나 꿈을 통해 알려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보편적인 방
우리 인생으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우선 관심이 무엇일까요? 구원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습니다’라는 고백만으로 하나님이 만족하신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도 소원이지만 낳고 나면 다른 소원이 있습니다. 그 자녀가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 더 큰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는 것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세상은 질서정연한가요? 아니면 무질서한가요?세상은 질서정연한 면도 있지만, 무질서한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유심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합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세상은 시작점이 하나인데, 한 곳에서 발현한 세상이 질서와 무질서로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세상은 분명 질서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우주를 통해 법칙과 질서를 발견합니다. 행성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생명체들의 유기적인 모습을 통해 그것들이 얼마나 질서에 잘 맞아 떨어지는지를 알고 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