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동네 옛 백제병원에서 우리 초량교회 앞을 지나 168계단 끄트머리까지가 이른 바 ‘이바구골목’이라는 브랜드를 가진 골목이다.‘이바구’란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다. 그러니 이야기 골목인 셈이고, 그 이바구란 다름 아닌 오랜 시간 속에 녹아있는 초량 사람들의 인생과 애환에 대한 이바구다. 골목이 추억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이유는 오랜 세월에 녹아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곧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다. 초량 이바구골목에는 그러한 삶의 이야기들이 습한 담벼락의 이끼처럼 끼어서 자라고 있다.청마(靑馬) 유치환도 그
초량에는 차이나타운(China Town)이 있다. 말 그대로 중국거리요 중국마을이다. 거리 전체가 붉은색 꽃등과 붉은색 간판으로 덮여있고, 대부분 중화요리집들이다. 오전 열시가 조금 넘으면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여 늦은 저녁까지 열기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초량에 차이나타운이 있는가?’ 궁금해 한다. 우리가 해적질과 노략질로 중국 사람들을 잡아온 것은 아니니 놀라지는 마시라. 낡은 흑백사진처럼 꽤 오래된 사연은 이렇다.19세기 말, 당시 조선을 두고 일본과 청나라가 군침을 흘리며 힘겨루기를 한다. 청나라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어느 땅이든 별명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티벳은 히말라야의 바람이 사시사철 불면서 ‘바람의 땅’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캄차카는 화산들이 지금도 연기를 뿜고 활동하면서 ‘불의 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초량엔 무슨 이름 하나를 갖다 붙이면 좋을까? 필자 생각에는 ‘골목의 땅’이 잘 어울리겠다. 골목이 없는 데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초량에는 마치 실핏줄처럼 골목들이 이어져있다. 골목이라는 실핏줄로 사람들이 흘러 다니면서 초량이라는 몸뚱이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지내왔던 것이다.‘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라는
팔순이 넘으신 은퇴 권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초량에서 근 육십년 이상을 사셨다. 결혼해 초량에 와서 지금까지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모진 풍상에서도 잘 견디시면서, 이제는 아름답게 늙어가고 계신다. 권사님은 주일학교가 위축되는 것에 안타까움이 참 많으시다.권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사오십년 전에는 초량에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저 윗동네에서부터 새까맣게 몰려 내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논물에 헤엄치는 올챙이 떼 같았다고 한다. 이 골목 저 골목마다 아이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이며, 떠들고 다니던 소리
‘터줏대감’이라는 말이 있다, ‘터’는 마을이나 공간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고, ‘주(主)’는 주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대감은 옛날 높으신 대감마님을 뜻한다. 결국 터줏대감은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초량에는 터줏대감이 사람이 아니라 놀랍게도 나무인데 이름 하여 ‘귀신나무’다. 귀하게 대접받는 몸이다. 나이도 워낙 오래 되어서 이 나무보다 더 오래 초량에 살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앞으로도 주민등록 앞자리 번호가 19세기 말쯤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아니면 ‘대감’자리를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
‘왜관(倭館)‘하면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말한다. 옛날 대학 동창 가운데 한 녀석이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왜관에서 온 길동’이라고 말했던 게 떠오른다. 왜관에서 온 ‘요시무라’가 아니라 왜관에서 온 ‘길동’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다가오면서 웃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출신이었다. 그런데 부산에도 ‘왜관’이 있는데, 원래 이름은 ‘초량 왜관’이다.부산은 일본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예부터 왜적이나 왜구들의 앞마당과 같은 곳이었다. 부산이 앞마당이라면, 앞마당 중의 앞마당이 초량
내 머리 속에는 ‘천안 삼거리’라는 말이 각인되어 있다. 참고로 나는 천안을 가본 적이 없고, 천안에 삼거리가 어딘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유명한 게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찌 되었든지 내 머리 속엔 ‘천안’하면 ‘삼거리’다. 천안에만 삼거리가 있겠는가? 우리나라에 널려있는 것이 삼거리다. 삼거리만 있겠는가? 사거리도 있다. 사거리만 있겠는가? 오거리도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부산에도 오거리는 꽤 있다. 이제 삼거리, 사거리, 오거리에서 하나만 더 나가보자. 육거리는 어떤가? 육거리는 찾기가 꽤 쉽지 않을 것이다. 바로
어떤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문명의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 위대한 둘을 꼽으라면 원(동그라미)과 계단이다.” 공감이 된다. 원을 통하여 바퀴가 만들어지고 이동에 있어서 속도와 편리함을 가져왔고, 계단을 통하여 높은 곳을 올라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초량에 이런 의미가 충분히 녹아있는 계단이 있으니, 이름 하여 ‘168계단’이다. 유치한 설명을 붙인다면 첫 계단을 밟으면서 마지막 발을 딛고 길가에 올라서기까지의 계단 숫자가 168개다.실제로 올라가보면 아주 힘들다. 계단 경사각이 45도에
오래 전 이야기다. 부산 살던 한 녀석이 방학을 맞아 서울 친척집에 갔다. 서울이란 곳이 부산서 올라온 어린 촌놈(?)에겐 으리으리했다. 서울 사촌은 제 것도 아니면서 제 것인 양 한강 다리 자랑, 빌딩 자랑, 자동차 자랑을 늘어지게 하면서 기를 팍 죽였다. 자랑의 하이라이트는 집 가까이서 보이는 고속도로였는데 “봐, 우리 서울에는 고속도로도 있다”고 방점을 찍었다.부산 촌놈은 이대로 당할 수 없다 싶었는지, 불타는 애향심으로 소리쳤다. “너흰 고속도로 있냐, 우린 산복도로 있어. 산 위에 길이 나서 차가 막 달려.” 산복도로의 정
장기려(張起呂)는 피난민이다. 그리고 장기려는 의사다. 우리나라 최고 입담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시민은 방송에서 장기려를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렀다. 장기려는 크리스천이요 장로다. 그리고 장기려에게 가장 즐겨 붙여진 별명이 ‘장바보’, 바보 장기려였다.어렸을 적 담벼락이 생각난다.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지금에 비하면 원시시대에 가까운 그 시절, 아이들에겐 담벼락이 스트레스를 푸는 곳이요 예술혼을 표현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담벼락에 가장 많이 그려진 낙서는 ‘누구누구 바보’였다. 바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온 담벼락에 바보들 천지였다
지금의 초량교회 예배당은 1963년에 건축된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이전 예배당은 지금의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허물어졌다. 참 아깝고 아쉬운 철거였다. 일제에 항거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했던 건물이었는데, 6·25 전쟁에서 마지막 낙동강 전선을 남겨두었을 때 전국에서 피난 온 목사와 장로들이 눈물로 온 마룻바닥을 적시면서 기도하였던 건물이었는데 말이다.역사의식보다는 지지리도 힘들었던 가난의 모습을 빨리 벗겨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시절이었기에, 뾰족한 말로 공박할 맘은 없지만 그래도 못내 아쉽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잠시 후, 열차는 종착역인 초량에 도착하겠습니다.”어렸을 적에 기차 한 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는 적어도 KTX를 탈 때마다 나의 호강과 조국의 번영과 무사한 도착에 감사한다. 친절하게도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승객여러분, 잠시 후 이 열차의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하니 잊으신 물건은 없는지 잘 살펴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옛날엔 지금 경부선 열차의 종착이 ‘초량역’이었다. 그때의 버전으로 하면 “한성(漢城)에서 출발한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종착역인 초량역에 도착합니다” 이랬을 것이다.부산역의 지번(地番)이 초량동 1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반가운 인사와 수다를 주고받은 뒤에 친구는 대뜸 ‘다음 주간에 부산 내려갈 일이 있는데 만나서 밥 한 그릇 먹자’고 했다. 갑작스런 제안에 ‘좋아. 어디서 만날까?’라고 물었더니, 친구는 ‘부산하면 서면이지, 서면에서 만나자’고 대답했다.그런데 ‘부산하면 서면이지’라는 친구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맞는 것은 지금의 서면이 부산의 중심가요 번화가라는 사실이다. 부산을 관통하는 중앙대로가 통과하며 은행, 백화점, 호텔, 심지어 성형외과를 중심으로 다양한 병원들이 개미집처럼 모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