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대표하는 특산물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것으로 감귤을 들 수 있다. 제주 어디를 가든 쉽게 눈에 띄는 이 감귤이 제주 교회들에 힘을 불어놓는 효자 역할을 한 일이 있으니 바로 2002년 시작된 제주노회의 감귤프로젝트이다.전에 언급한 바 있듯이 제주의 복음화는 아직도 10%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 원인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뿌리 깊은 미신문화의 영향이 가장 크다. 대표적인 게 제주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신구간(新舊間)’이라는 풍속이다.24절기 중 마지막인 대한 후 5일째부터 입춘이 오기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제주의 목회자들은 바빠진다. 각자 사역하는 교회의 성탄행사 준비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6년째 이어지고 있는 ‘목자들의 캐럴축제’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이다.제주CBS의 기획으로 시작된 ‘목자들의 캐럴축제’는 언제부터인가 제주지역 교회들의 대표적인 성탄 이벤트로 자리잡았다. 전문 음악인이 아닌 목회자들이 메인 팀을 이루어 성탄절의 감동적인 의미와 따스한 정취를 가득 담은 찬양제로 마련한다.해마다 색다른 구성으로 축제를 꾸미는데, 지난해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행사에는 뮤지컬 형식으로 2시간
제주노회가 조직된 것은 1930년의 일이다. 독노회가 이기풍 목사를 선교사로 보내 제주선교가 시작된 지 22년 만에, 제주의 교회들은 더 이상 ‘선교지 교회’가 아니라 독자적인 지역노회를 운영하며 총대를 파송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일원으로 어엿이 우뚝 선 것이다.제19회 총회에서 전남노회가 청원한 제주노회 분립안이 가결됨에 따라, 1930년 11월 14일 제주성내교회에서는 17개 교회 목사·장로들과 선교사들이 자리를 함께 한 가운데 첫 제주노회 정기회가 열렸다. 이 역사적인 자리에서 초대 노회장으로 최흥종 목사가 선출됐다.분립
제주순례길이 조성된 것은 2012년의 일이다. 당시 개국 12주년을 맞은 제주CBS의 임경중 본부장의 제안으로 제주의 모든 개신교회가 교파를 초월해 머리를 맞댔다. 100년 동안의 제주교회사에 얽힌 이야깃거리를 저마다 찾아내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모은 결과 마침내 제주 서남부 일대를 아우르는 네 개의 기독교 순례코스를 만들었다.제1코스인 ‘순종의 길’은 제주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이룬 최초 신앙공동체인 금성교회에서 시작한다. 첫 기도처와 옛 예배당 그리고 금성교회를 함께 섬긴 조남수 선생과 이도종 목사의 생가 등 제주 기독교신앙의 뿌
배형규 목사의 순교라는 가슴 아픈 사건을 뒤로 하고 시작된 2008년은 제주선교 100주년의 해였다. 이기풍 선교사가 조선독노회 파송으로 제주 땅을 밟은 지 딱 1세기가 된 시간을 제주의 교회들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큰 감사와 의미를 담아 보냈다.제주도기독교교단협의회는 이 뜻깊은 해를 알차게 맞이하기 위해 3년 전 제주기독교100주년기념위원회(위원장:김정서 목사)를 조직한 후, 공모를 통해 로고와 엠블럼을 확정하고 사업설명회를 개최하며 제주특별자치도로부터 예산지원을 받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그 결과 4월 27일 서귀포 월
2007년은 한국교회가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전국 교회가 ‘Again 1907’의 기대와 소망으로 들썩이는 가운데, 1월 26일부터 27일까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24개 주요 교단장들의 콘퍼런스가 열리며 그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제주선교의 시작이 평양대부흥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에 다른 지역에서보다 그 의미가 남달랐다.그해 7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리며 분위기가 최고조에 올랐을 시점에, 한국교회 특히 제주의 교회들을 비탄에 빠뜨리는 뜻밖의 소식이 머나먼 중동 땅
제주도 남쪽 모슬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특별한 예배당 하나가 있다. 뭍에서는 한국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중, 국군 공병대가 건축한 이 예배당은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받았다. 바로 강병대교회당이다.‘강한 군대를 키워낸다’라는 뜻을 가진 강병대교회라는 이름은 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운영되던 육군훈련소의 이름 ‘강병대(强兵臺)’에서 따왔다. 1952년 1월 제9대 훈련소장으로 취임한 장도영 장군은 신앙을 통해 장병들의 전력을 극대화하려는 구상을 했고, 이에 따라 그의 지시로 그해 5월 예배당 착공이 이루어졌다.강병대교회가
진개동산이라 불리는 모슬포 항구 인근 언덕길에는 세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왼편의 4·3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비와 오른편의 당시 경찰서장 문형순을 기리는 공덕비 사이 한가운데에 한 목회자의 공덕비가 놓여있다. 주인공은 모슬포교회를 담임한 조남수 목사이다.조남수 목사를 제주 사람들은 한국판 ‘쉰들러’라고도 부른다.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서 학살의 위기에 처한 수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인물 오스카 쉰들러에 비견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조국 해방이 되었을 때 조남수는 제주에 남아있
서귀포 대정골성에는 추사관이라는 역사적 장소가 있다. 바로 여기서 유배생활을 하며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시켰다는 김정희 선생의 인생과 애환이 녹아있는 곳이다. 여기서 불과 담장 하나 건너엔 제주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을 위한 다른 공간이 마련돼 있다.제주 대정장로교회. 70여 년 전 제주 땅을 온통 뒤흔든 4·3사태 당시,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사역하다 숨진 고 이도종 목사를 추모하는 작은 공원을 예배당 앞마당에 마련한 교회이다.이도종 목사는 제주 출신 첫 목회자이다. 일제가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제주선교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인물들이 이기풍 윤식명 김창국 등 목사였던 것은 맞지만, 배후에서 여성 사역자들이 감당했던 역할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남녀의 구분이 엄연했던 시대, 여성들을 믿음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서와 문화에 공감하면서 길잡이가 되어 줄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다. 전도부인들은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한국교회에 여성사역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데는 이 땅에 온 최초의 여성선교사이자 미국북감리회 소속 의료선교사였던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의 여성주일학교가 효시 역할을 했다. 여성주일학교는 이름도 없이 남성들
“저는 현재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강한준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미화 60원씩을 보내겠습니다. 이 돈으로 제가 살던 제주의 법환리에 전도인 한 명을 보내셔서, 교회가 세워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전남노회 전도국에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가 전해진 것은 1917년 6월의 일이었다. 강한준은 제주에서 살다가 천주교도들과 연루된 신축교란, 일명 ‘이재수의 난’이 벌어졌을 때 마침 조선인의 대규모 노동이민이 이루어지던 하와이로 이주한 인물이다.이민하는 과정에서 예수를 믿게 된 강한준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고, 하와이의 한인
제주도 관덕로 2길, 삼도동이라 불리며 옛 제주 성읍의 중심지를 차지한 이 동네에는 오래된 팽나무 하나가 있다. 높고 넓고 풍채가 좋은, 코흘리개 아이도 넉넉히 타고 오를 만큼 편안한 자태를 지닌 이 팽나무에는 첫 제주선교사 이기풍 목사와 연관된 사연 하나가 숨어있다.이기풍 목사 내외는 이 동네에서 섬 곳곳을 오가며 복음을 전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밤늦게 돌아오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목사의 어린 막내 딸 사례는 온 종일 심심하고 외로웠다. 해질녘이면 행여나 귀가하는 부모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라
1908년 1월 11일 길선주 목사가 장대현교회 강단에 올랐다.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이날 그의 설교는 사뭇 진지하고 도발적이었다. 길 목사는 바로 지난 해 자신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동료를 향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당신이 평양의 첫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졌던 일을 기억하시오. 그러니 설령 제주사람들이 당신을 만나 돌을 던지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마시오. 어떤 상황을 만나든 선교사로서 사명감과 자긍심을 굳게 세우시오.”설교의 청취자는 이기풍이었다. 그는 이날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결정에 따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
제주도 주민이 되어 살아간 지 21년째이다. 강원도 홍천의 한 시골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후, 서울에서 신학을 하고 목회생활을 한 세월까지가 45년이었으니 순전히 살아온 시간만으로 보면 내 인생에서 제주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 정도인 것이 맞다.그러나 제주도에서의 세월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제 나는 누구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제주도를 ‘제2의 고향’, ‘비전의 땅’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 제주에서 알게 된 이 섬의 역사와 아픔들, 제